[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이런 공연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배우 하도권(47)이 8년 만에 뮤지컬 무대로 돌아왔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 스토리를 기반으로 재창작한 이머시브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피에르역이다. '그레이트 코멧'은 기존 객석 공간에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 위에 객석을 두는 등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공연이다. 연기를 겸하는 연주자, 연주를 겸하는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고,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오기도 한다.
11일 서울 종로 서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하도권은 "이 작품의 마지막 조각은 관객"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어떤 조각을 맞춰주느냐에 따라 전체 공연이 달라져요. 그날의 관객들이 파란색 조각을 맞춰주면 전체 공연이 파란색이 돼죠."
서울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하도권은 2004년 뮤지컬 '미녀와 야수'로 데뷔해 햄릿, 오페라의 유령, 아가씨와 건달들, 레미제라블 등에서 탄탄한 실력을 쌓았다. 2016년 영화와 드라마로 무대를 옮겨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스토브리그, 펜트하우스, 내 남편과 결혼해줘 등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구축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동한 8년간 그는 어떤 뮤지컬 무대에도 오르지 않았다. "매체로 가며 퇴로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뮤지컬을 도망갈 공간으로 생각하면 드라마·영화에 절실할 수 없을 것 같았죠."
뮤지컬 무대를 떠난 후 몇년간의 공백과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절실한 시간들이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시작이었어요. 저라는 배우를 세상에 내놔 준 소중한 작품이죠. 이후 조금씩 일이 많아졌습니다. 스케쥴만 맞다면 최대한 많이 활동했어요. 6, 7년 정도 쉼 없이 달렸죠. 꿈꿔왔던 일이니 너무 좋았죠. 그러다 지난해 말쯤 '내가 지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운명처럼 '그레이트 코멧'이 하도권을 찾아왔다. 그가 뮤지컬에 데뷔할 당시 각 파트 팀장이던 제작사 대표·부대표가 '너무 위대한 작품'이라며 뮤지컬 출연을 권유했다. 하도권이 연기하는 주역 '피에르'는 부유한 귀족이지만 사회에서 겉돌며 우울과 회의감 속에 방황하는 인물이다.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직접 연주하며 무대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마무리한다.
하도권을 피에르의 외로움과 결핍에 공명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배역들이 제 안의 일부분을 투영하고 있었지만 '피에르'는 저와 가장 많이 맞닿은 캐릭터였어요. 이 작품을 통해 위로 받았고, 제가 받은 위로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운명적으로 다가온 작품이지만 연습은 혹독했다. '코드 몇 개 누를 줄 알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연을 수락했는데 연습을 앞두고 받아든 악보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코디언은 연주해본 적이 전혀 없는 생소한 악기였다.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하루 8, 9시간씩 연습했다. 충무아트센터에 마련한 공식 연습실이 밤 10시에 문을 닫으면 아코디언 선생님과 따로 빌린 대학로 연습실에서 새벽 2시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초조함에 배가 고픈 지도 몰랐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졌다.
"연습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과연 개막에 맞춰 준비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다들 밥을 먹으러 간 사이에 창밖을 보며 혼자 아코디언 연습을 하거나 피아노를 쳤습니다. 오랜만의 복귀인 만큼 무대 위에서 '최고'를 꺼내 보여드리고 싶은 부담도 있었죠. 그런 시간들이 저를 피에르화시켰어요."
하도권은 "'그레이트 코멧'을 하며 겸손해졌다"고 했다. "전에는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잘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뤄낸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졌던 것이라고, 누가 했어도 잘 됐을 텐데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습을 하며 피아노와 아코디언은 물론 가장 자신있던 노래에서도 한계를 봤다"며 "연습 과정에서 '이거 밖에 안 되나', '왜 안 되지' 좌절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연습했던 시간이었죠.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동정의 아이콘'이었죠.(웃음)"
하도권은 그러면서도 자신이 연기하는 '피에르'에 대해 "무대 위에서 피에르의 아픔, 감정에 대해 보다 깊게, 충분히 느끼고 있다"며 "8년간의 경력 단절이 있었지만 대본을 깊게 바라보고, 배역을 이해하는 능력은 좋아졌다"고 했다.
"무대에서만 맡을 수 있는 세트의 먼지 냄새, 조명이 얼굴을 탁 때릴 때의 따뜻한 느낌이 그리웠습니다. 무대에서 재주를 뽐내기보다 정확하게 배역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화려하지 않아도 연기를 통해 누군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보람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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