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8년 만에 첫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 출간
"상상의 불을 붙이는 부싯돌 같은 책이길 원해요"
보편적인 단어로 지극히 새로운 감정을 환기하고, 개별적인 사생활에서 공통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산문시 얼굴을 한 그의 노래 힘은 물론 멜로디에도 있다. 아울러 같은 우리말이라도 감히 의미를 누설하지 않고 절제된 풍경을 보여주는 배치, 인내의 끝에서 글의 인상을 결정짓는 묘수의 한방을 갖고 있는 노랫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픽션집 '지문사냥꾼'과 그림책 '어느 날,' '기다릴게 기다려 줘' '당연한 것들' 등을 낸 작가인 이적의 산문집을 많은 독자들이 기다린 이유다.
1995년 10월 듀오 '패닉으로 첫 음반을 낸 이후 지난 2월16일 데뷔 1만일을 맞이한 그가 무려 28년 만에 첫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김영사 펴냄)을 펴냈다. '말' '숲' 등의 단어를 편린 삼아 써내려간 101개의 산문들은 음 없는 노래라고 과언이 아니다. 글자 하나하나가 음표처럼 읽혀서 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선율을 빚어낸다. 이적은 음 없이도 노래를 짓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음은 31일 서울 중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이적의 단어들'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나온 일문일답.
-책은 언제 쓰셨는지요. 출간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가깝게는 한 3년 정도 썼어요. 책을 쓰기로 하고 원고를 쌓아가기엔 동기부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글들을 SNS에 올려볼까?'라는 생각을 했죠.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을 선택하면서 사진이 들어가는 란에 글을 넣고 싶었고 페이지를 넘기면 아주 긴 글도 쓸 수 있지만 되도록 한 화면에 압축해서 글을 넣고 싶었습니다. 어떤 것에 반응이 큰지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죠. 트위터는 한 게시글에 정해진 글자 수가 있잖아요. '한정된 틀 안에 넣을 수 있는 픽션을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 중에서 책과 어울리는 글들을 뽑고 다듬어서 책의 모양의 완성이 됐습니다."
-이적 작가님의 작품에는 세상을 향한 질문과 시대를 향한 위로가 함께 담겨 있는데 '질문하는 나'와 '위로하는 나'는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지요.
"질문하는 시기가 있잖아요. 패닉 2집에 'UFO'라는 노래가 있는데, 왜 '모두 죽고 나면 사라지는 걸까'라면서 노래를 시작해요. 그런 질문들이 좀 화가 나 있었어요. 젊은 제가 보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기성세대에게 화를 냈죠. 예전에는 이렇게 신랄하게 묻는 질문들이라면, 지금도 계속 질문을 하는데 지금은 '도대체 왜 그럴까' 체념과 허탈함이 담겼어요. 어릴때는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놨느냐며 시스템을 비판하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나도 똑같은 인간이구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위로한다는 의미는 그러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왜 이럴 수 밖에 없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왜 꾸역꾸역 살아가는가'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같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담다 보면 이제 서로를 알게 되고 공감하며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같이 그 질문을 계속 해나가는 것 같아요. (질문하는 나와 위로하는 나의 비율의 변화 비율은) 모르겠고 질문의 톤이 달라진 거죠."
-이전엔 픽션을 쓰셨는데 이번에 산문집을 쓰시면서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요?
"픽션 같은 글이 이번 책에도 들어있어요. 픽션이 아닌 글이 더 조심스러워요. 제가 드러나기 때문에요. 픽션은 제가 뒤로 숨고 한발 빠질 수 있죠. 예민한 주제일수록 오히려 픽션을 쓰게 되죠. 처음에는 긴 글을 구상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가르치려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저는 역시 짧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많이 덜어내고 압축했습니다. 대신 한 단어, 한 문장이 조금 더 밀도가 있으면 독자들이 나머지 부분을 이제 채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작업했습니다."
"말하는 것도 언어를 가지고 하다 보니 가사, 방송, 저한테는 다 연관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적의 단어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단어이기도, 타인의 관계 속에서 나온 단어이기도 하다면서요.
"편집자가 단어를 300개정도 보냈는데, 놀라운 일은 보내준 단어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단어는 남의 것이더라고요. 숙제 같았습니다. 그러다 저 혼자 생각하면서 이 단어, 저 단어를 써보게 됐죠. 굉장히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 단어가 101개예요. 보통은 0단위로 맞추는데 의도가 있나요?
"의도가 있지는 않았어요. 무조건 분량을 늘리는 게 좋지는 않고 유기적으로 어우러졌으면 좋겠어서 빼다보니 101개가 됐습니다. 그룹 '워너원'이 떠오르기도 하고, 천일야화도 1000과 1이잖아요. 101도 그런 느낌이 들어서 진행했어요."
-101개의 낱말을 고르게 된 기준은 무엇인가요?
"기준이 없어요. 저도 리스트업을 해봤었어요. 단어의 범주로요. 예를 들어 동식물로 갈 수도 있고, 되게 철학적일 수도, 음악적일 수도 있는데 그 사이서 균형을 맞추자니 '이건 아예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 그때 떠오르는 단어들로 썼어요. 단어를 선택해서 가는 것도 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단어 제목을 붙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안 되는 것들은 아예 안 되더라고요. 그런 글들은 SNS에 올리지도 않았어요."
-SNS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동기부여가 더 필요했어요. 제가 기본적으로 게으르고 '관종끼'가 있는 거죠. 그냥 쓰라고 하면 자꾸 미루고 안 써요. 일단 올리면 사람들이 이에 대해 얘기를 하잖아요. 정말 신기한 게 이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중요해서 짧은 글일수록 더 많이 수정해야 했어요. 올리고 나면 '그렇게 쓰지 말걸' 했죠. 그런데 사진 플랫폼이다 보니 수정할 수가 없어요. 교정이 안 돼요. 또 이미 많은 분들이 읽으셨는데 게시물을 삭제하게 되면 상황이 이상해지죠. 그러면서 길게 쓰려던 글을 압축해서 쓸 수 있었고 의미가 있었습니다."
"노랫말은 보통 99% 노래가 먼저 있고, 작사가 이적이 말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말의 글자 수라든지 다 한정돼 있죠. 곡 구성에 따라서도 다르죠.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면 가사도 반복하기도 하고, 약간 비틀기도 해요. 예를 들어 초반에 조용히 들어가고 후반에서 소리지르는 고음을 부른다면, 가사도 앞 부분은 읊조리는 내용이어야 하고 뒷부분은 절규하는 내용이어야 하죠. 발음도 예민해요. 가사를 썼을 때는 이쁜 단어가 막상 녹음하면 이쁘지가 않은 경우도 있죠. '다행이다'라는 곡에서 원래는 '덕분'이라는 가사를 썼는데 녹음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때문'으로 고치는 경우가 있었어요. 불가피하게 바꾸는 건 다 발음 때문이에요. 그러고 나면 제가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른 뉘앙스가 생기는 그런 재미가 있어요. 산문은 그런 제약이 없어요. 제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건 저도 모르게 이 글들을 계속 속으로 읽게 된다는 거예요. 한번은 편집자가 글이 길다고 한번 끊고 가자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이 글에도 읽는 리듬이 있다. 앞 문장을 짧게 치고, 뒷부분은 긴 흐름으로 가야한다'라고 말했죠. 제게는 흔히 래퍼들이 말하는 음악적 플로우를 생각한 글이 아닌가 해요."
- 청년시절의 이적과 지금의 이적,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이 있다면요?
"나이를 많이 먹었고, 음악 활동도 오래했고, 경험치도 쌓였어요. 날이 서있다가 사회화가 됐다고 할까요. 인간친화적으로 변한 것 같어요. 음악적으로는 노래를 잘 부르게 됐죠. 지금보다 많은 표현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음악을 만들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음악적 느낌이 같아요. 왜 선배들이 앨범 발매 텀이 길어지나 했는데, 알겠더라고요. 뛰어봤자 결국 이적이었어요. 추구하는 음악이 비슷해요."
-음악에 관한 책을 쓸 생각도 있나요?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건축에 관해 춤을 추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그만큼 '헛다리 짚는 것'이다라는 의미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 곡에 대해 비평가가 글을 썼다고 해봐요. 그 글을 읽고 우리는 단 한 음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만큼 먼 이야기인데 이제 점점 다가가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요즘 특별히 자주 읽거나 탐닉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지요.
"저는 갈수록 좀 유머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넷플릭스에서도 보는 게 스탠드업 코미디나 재미있는 거예요. 소설도 블랙 유머가 있는 책을 보게 되고. 너무 진지하기만 한 것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유머가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걸 믿어요. 예능을 했던 것도 그 재밌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 같아요."
-'빨래', '거위의 꿈 등 곡을 쓰게 된 배경을 적었는데, 배경을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빨래'는 루시드폴이랑 전화를 하는데 '빨래를 해야겠다. 그런데 오후에 비가 오려나'라는 말을 듣고 이 이야기를 곡에 써도 되겠냐고 허락을 맡아 썼어요. 루시드폴이 시인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빨래'라는 곡이 우리에겐 '빨래를 한다'라는 이미지가 세탁기를 돌리는 이미지가 아니에요. 우리 마음으로는 막 손으로 짜고 물을 버리고 이러면서 내 안에 있는 온갖 때를 지워버리고 싶은 게 빨래죠. 그게 참 말처럼 쉽지 않다는 가사를 가지고 있어요. 일본에 발매를 할 때도 최대한 의미를 가져가고 싶었는데 결국 '세탁'이 되고 말았어요. 말이라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써왔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곡을 만드는 게 시간이 더 오래 걸려요. 음악은 곡을 쓰는 것부터 해서 연주자들과 상의하고 수정하고 믹싱하고 마스터링하고 굉장히 긴 물리적인 시간을 쓰죠.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서운하기도 했었어요. 제가 곡에 들인 시간이 총 10이라고 했을 때, 작곡이 9 작사가 1인 경우도 있어요. 그 1의 시간을 투자한 가사가 '왜 이렇게 주목을 받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닌 적도 있어요. 글을 쓰기 쉽다는 뜻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작곡이 어렵다는 것이죠. 글은 가사가 아니라면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음악은 제가 아무리 실험적인 곡을 한다고 해도 청자들의 이해의 지평 안에서 새로움을 추구해야 해서 쉽지 않아요."
-독자들에게 책이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나요.
"상상의 불을 붙이는 부싯돌 같은 책이길 원해요. 침대맡에 두고 아무때나 펼쳐 읽을 수 있는, 리프레시되는 글이길 바랍니다."
- 앞으로의 꿈은요?
"40대에 음악극을 하고 있을 거 같다고 20대 때 말했었는데, 40대 때 공연을 제일 많이 했어요. 그만큼 사회가 달라졌다는 거고 운이 잘 따랐던 것 같아요. 음악극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숲'이라는 글은 '숨 숲 숨 숲 쉼' 이렇게 끝나는데 정말 숲을 상상하며 쓰신 건지요?
"'숲'이라는 글자를 보면 좌우 대칭이에요. '숨'이라는 단어도 그렇고요. 우리는 숲에 가면 숨을 쉬고, 숨 쉬러 숲에 가는 거잖아요. 그 행동이 우리에게는 '쉼'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런 말 맛과 글자의 모양에 영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이적 작가님 삶에 채우고 싶은 단어들이 있다면요.
"웃음, 여유, 사랑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어요. 꿈이 있지만 그 목표를 위해서 '미친듯이 달려가자' 유형의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번아웃이 오죠. 그렇다고 '게으르게 가자'라는 것도 아니에요. 저는 '호흡을 길게 가자' '꾸준히 하자' 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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