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소화장치가 펜션 구해" 내집 방어엔 역시 비상소화장치 [4·11강릉산불 한 달]

기사등록 2023/05/12 08:53:22 최종수정 2023/05/12 09:00:06

1500만원짜리 비상소화장치 경포동 9대 중 6대 사용 집·펜션 살려

550억원짜리 초대형 진화 헬기 강풍에 뜨지 못해 초기 진화 못해

2019년 고성속초 대형산불 때 위력 입증되면서 이듬해부터 설치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
[강릉=뉴시스]김경목 기자 = 태풍급 강풍에 불어닥치는 산불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도움을 요청하는 수백 통의 전화가 119 상황실에 빗발치지만 초속 30m에 육박하는 강풍이 불면 550억원짜리 초대형 진화 헬기도 맥을 쓰지 못한다. 초속 30m에 육박하는 강풍에 뜨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금방 달려오는 소방차도 산불이 순식간에 이곳 저곳으로 번지면 못 올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11일 오전 강원도 강릉 경포동(난곡동·저동·안현동 통합행정명)에서 일어난 산불이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내 집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안전장치는 1500만원짜리 '비상소화장치'임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강릉 산불 한달을 맞아 화재 현장을 다시 찾았다.

12일 저동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 마을에는 리조트 못지 않은 고급 펜션(농어촌민박) 여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마을은 이번 산불로 전쟁터처럼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변상복씨의 숲속황토펜션은 멀쩡했다.

사건 당일 사위가 달려와 펜션 앞에 설치해둔 비상소화장치함 문을 열고 소화전을 연결한 뒤 호스를 끌어와 펜션과 안채 살림살이 집 지붕과 주변에 미친 듯이 물을 뿌린 덕분이다.

변씨의 집을 기준으로 마을길이 끝나는 도로변 쪽의 펜션들 근처에도 비상소화장치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용하지 못했다.

길 건너 안현동 노부부의 집 앞에도 비상소화장치가 있었으나 사용하지 못했다. 노부부의 집 역시 검게 그을리고 주저앉았다.

노부부의 집 뒤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이번 산불로 유일하게 숨진 전모(87)씨의 집이 나온다.

[강릉=뉴시스] 김경목 기자 = 이번 산불에서 비상소화장치를 사용해 화마를 피한 강릉시 저동 변상복씨의 숲속황토펜션. 사위가 비상소화장치로 미친듯이 불을 뿌려 펜션이 멀쩡하다. 2023.04.28. photo31@newsis.com
전씨의 집 앞에 살고 있는 조성배씨 부부도 이날 집 수돗가에서 물을 틀고 고무호스로 힘겹게 물을 뿌려 집을 지켜냈다.

조씨는 "집 근처에 비상소화장치가 있었다면 수돗가 고무호스보다 수압이 더 좋은 소화전 소방호스가 훨씬 좋았을 것이고 안타깝게 숨진 이웃의 집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경포동 비상소화장치 9대 중 6대 사용돼 집·펜션 살렸다…집집마다 설치해야 피해 줄인다

강릉소방서에 따르면 경포동에는 총 9대의 비상소화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그 중 6대가 이번 산불에서 주민들이 잘 사용해 인명과 재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현재 강릉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는 지난해 3월 큰불이 났던 옥계면 남양리 마을회관 앞을 비롯해 강동면 하시동 풍호마을, 노암동 축구공원 등 산림이 인접한 곳을 중심으로 도로변에 315대가 설치돼 있다.

강릉소방서는 올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216대를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비상소화장치 1대 설치 비용은 1500만원이다. 강릉소방서는 현재 6억1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216대를 설치하려면 32억4000만원이 필요하다.

한국국토정보공사, 통계청에 따르면 강릉 면적은 1만6829㎢이다. 인구수는 21만630명(4월 기준)이다. 산림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80%에 달한다.

강릉시와 강릉소방서의 1차 피해 조사에서는 이번 산불로 전파되거나 반파된 건축물이 총 2666개로 확인됐다.

경포동에 설치된 9대의 비상소화장치가 모두 잘 쓰여져 여러 채의 집과 펜션을 더 살렸다고 해도 전체 건축물 피해를 줄이지 못한다.

[강릉=뉴시스] 김경목 기자 = 강릉시 저동 숲속황토펜션 앞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 비상소화장치 박스를 열면 소화기 2대와 소화전과 연결된 호스가 있다. 2023.04.28. photo31@newsis.com
재난당국의 한 관계자는 "아파트, 고층 건물 등 다중밀집시설에는 비상소화장치와 똑같은 옥내소화전을 소방시설 설치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있다"면서 "옥외 설치하고 있는 비상소화장치도 산림과 인접한 마을을 중심으로 집집마다 설치해야 황토펜션의 사례처럼 산림 화재로부터 집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했다.

◆2019년 고성속초 대형산불 때 고성 용촌리 마을 살아남아…알고 보니 공동경비로 소화전 설치해 재난 막아

비상소화장치는 2019년 고성속초 대형 산불 때 위력을 발휘, 산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설치 사업이 진행됐다.

당시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마을에는 공동경비 100만원을 들여 설치한 소화전이 있었다.

그날 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산에서 시작된 불은 태풍급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속초 바닷가 쪽으로 번져가며 엄청난 피해를 냈다.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마을의 주택 23채 가운데 19채는 살아남았다.

퇴직 소방공무원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설치한 소화전이 제대로 쓰였다.

비상소화장치 사업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산불 위험 취약지를 선정해 설치되고 있다.

강릉소방서 심규삼 서장은 "2019년 고성속초 대형 산불 때 고성군 용촌리에 살던 퇴직 소방공무원이 소화전을 설치해 잘 쓰여진 사례가 확인되면서 2020년부터 국비와 도비 예산으로 비상소화장치를 본격적으로 설치하기 시작했다"면서 "우리 지역에도 필요한 비상소화장치를 계속해서 설치할 계획이고 그에 따른 예산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photo3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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