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내 헝가리계 주민 보호 빌미 삼아
독재자 오르반 총리 두드러진 친러 행보
러 에너지 도입해 국내 유가 안정 통한
헝가리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 확보 노려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우크라이나와 150㎞ 가량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연합(EU)이 러시아를 제재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크라이나가 휴전 협상에 응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헝가리는 또 서방 무기를 헝가리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오르반 총리가 이처럼 우크라이나에 적대적 정책을 유지하는 목적은 내륙국가인 헝가리가 러시아의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함으로써 에너지 가격을 낮춰 자신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외교위원회 연구원 안드라스 락츠는 “지난 2월 이후 오르반은 순전히 국내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여왔다. 한마디로 러시아를 자극해 헝가리에 재앙이 될 가스와 오일 공급 중단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미 워싱턴포스트(WP)는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헝가리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헝가리의 반 우크라이나 행보에 빌미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르반 총리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이의 관례를 갈수록 냉각돼왔다. 젤렌스키는 공개적으로 오르반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통에 냉담하다고 비난하고 오르반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피난민 100만 명을 받아들였고 수백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이자 “비자유주의적 기독교 민주주의”의 주창자인 오르반 총리는 영토 확장을 노리는 헝가리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언제가 우크라이나에 속한 헝가리 영토를 탈환하려 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오르반은 지난달 축구 경기장에서 우크라이나 등 인접국가의 영토 일부가 포함된 옛 헝가리 지도가 그려진 스카프 차림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정부가 키이우 주재 헝가리 대사를 소환해 설명을 요구했고 오르반 총리의 행동이 “우호 관계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 발발 한달 뒤인 지난 3월 양국간 갈등이 표면화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오르반 총리에게 마리우폴을 초토화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젤렌스키는 EU 정상들을 대상으로 한 화상 연설에서 “빅토르, 당신은 마리우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알면서도 제재를 주저하는가? 러시아와 계속 교역을 하려는가? 주저할 시간이 없다. 진작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고 질타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전쟁 불개입을 공약하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오르반 총리는 젤렌스키와 “브뤼셀의 관료들” “소로스 제국”과 “국제 주류 언론”을 적으로 불렀다.
지난 달 오르반 총리와 같은 당 소속의 카탈린 노박 헝가리 대통령이 키이우를 방문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헝가리는 이달 들어 EU가 우크라이나에 긴급 차관 19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방해했다. EU가 러시아 석유 수입을 금지하는 것도 막았다.
오르반 총리는 자신이 우크라이나를 도우려 하지 않으며 EU 차원이 아니라 개별국들이 우크라이나에 차관을 제공해야 한다는 보도가 “가짜 뉴스”라고 트윗했다.
오르반은 지난주 연말 기자회견에서 “유럽 대부분이” 전쟁에 끌려들어갔으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나라들이 “발목이 잡혔다”면서 “막대한 재정지원이 목까지 찼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다.
헝가리는 1차 대전 중 영토의 3분의 2 가량을 잃었다. 현재 200만 명의 헝가리 민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에도 13만 명이 있다. 이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 산맥 서쪽 가난한 지방인 트랜스카르파티아에 있다. 이 지역은 과거 헝가리 영토였으나 지금은 인구가 130만 명에 달해 헝가리 민족이 소수민족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와 헝가리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돼 왔다. 이 지역 헝가리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오르반의 권력 유지에 핵심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약 40% 가량이 헝가리를 “적국”으로 간주한다.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이어 가장 높은 비율이다. 트랜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이 같은 불만이 거침없이 표출되고 있다. 지난 10월 헝가리 국경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무카체베(헝가리명 문카치)의 당국자들이 헝가리 신화에 나오는 거대 매인 투룰(turul) 동상을 해체했다.
폭이 4.5m에 달하고 무게가 1t 가까운 이 동상은 2008년 과거 헝가리 귀족이 살았던 팔라녹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트란스카르파티아가 과거 헝가리 땅이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헝가리와 우크라이나의 우호관계를 강조하는 동상이었다.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트리줍(tryzub) 삼지창 문장이 세워졌다. 무카체베 당국자들은 해체한 투룰 동상을 트란스카르파티아 역사 박물관에 전시하고 다시는 공개된 장소에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안드리 발로하 무카체베 시장은 “우크라이나 상징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다. 트란스카르파티아는 우크라이나 땅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점을 헝가리 정부에 분명히 한다”고 말했다.
페테르 씨야르토 헝가리 외교장관은 “불필요한 도발”이라며 헝가리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란스카르파티아 최대 도시 우즈고로드의 우크라이나 헝가리인 민주연합 대표 산도르 슈페닉은 “모든 헝가리인들의 영혼에 침을 뱉은 행위”라고 분개했다.
헝가리 당국이나 극우 단체들이 투랄을 재건하려고 시도할 경우 언제든 갈등이 폭발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은 오르반 총리의 스카프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와 우크라이나 관계가 악화한 것을 보여주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헝가리 국경에서 15㎞ 가량 떨어진 라티프치 마을 주민 1300명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를 사용하지 않으며 헝가리 방송을 주로 듣고 있다. 이들에게 전쟁은 먼 나라 일이다.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도 정전을 겪고 있지만 러시아의 공습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국심은 없고 마을과 지역, 인종으로 뭉쳐 있다. 현지 주민 모니카는 “우리는 트란스카르파티차에 산다.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헝가리는 인접국의 헝가리계 주민들에게 막대한 재정지원을 해왔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 상당수가 이를 내정 간섭으로 본다. 반면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헝가리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베레호베의 졸탄 바브작 시장은 헝가리의 재정 지원이 부족한 시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헝가리는 재정지원을 통해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헝가리 문화가 소멸하는 것을 막는데 집중하고 있다. 헝가리인들이 수천 년을 살아온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또 해외 거주 헝가리계 주민 100만 여명에 여권도 발급했다. 이들은 오르반 총리의 탄탄한 지지 기반이 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중 국적이 불법이다. 2018년 우크라이나는 베레호베에서 여권을 발급한 트란스카르파티아 주재 헝가리 영사를 추방하고 여권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반역죄” 수사에 나섰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가 2017년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강제하는 법령을 채택한 것을 두고 헝가리 민족의 인권을 탄압하는 동화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법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학교에서 헝가리어를 가르치는 것도 금지한다.
우즈고로드에서 500년 이상 가계를 이어온 야노스 헤데르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는 “헝가리 주민들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축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와의 언어 갈등을 이유로 지난 달 수도 부카레스트에서 열린 나토 외교장관 회의에 우크라이나가 참석하는 것을 막았다. 씨야르토 외무장관은 당시 페이스북에 “우크라이나가 트란스카르파티아 헝가리 주민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전까지” 헝가리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회의 참석을 막을 것이라고 썼다.
오르반 총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로 트란스카르파티아 헝가리 주민들 보호를 내세운다. 그는 헝가리 사람 한 사람도 “우크라이나 모루와 러시아 해머 사이에 놓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내 헝가리 주민 다수가 러시아에 맞서는 전쟁을 지지한다. 노박 헝가리 대통령은 헝가리계 주민 500명 이상이 “최전선에서 피를 흘렸다.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다”고 밝혔다.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헝가리어를 말하며 성장해온 크리스티안 슈키르약(30)은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가족과 함께 러시아군이 학살을 자행한 키이우 인근 부차에 살다가 러시아군이 닥치기 2시간 전 간신히 빠져나와 트란스카르파티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헝가리인인 동시에 우크라이나인으로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헝가리 전통과 역사를 사랑한다. 헝가리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오르반 총리의 헝가리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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