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제 11회 서울 레코드 페어' 현장에서 만난 MZ세대 회사원 김소희(27) 씨는 바이닐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냈다. 그는 올해 초 홍대 일대에서 열린 '제 10회 서울 레코드 페어'도 방문했었다. "LP 소리는 포근해서 좋아요. 장비는 좋은 걸로 아직 못 샀는데, 돈을 모아 나중에 사고 싶어요."
보통 LP(Long Play)라 부르는 바이닐 레코드는 직경 12인치(30㎝)다. 크기는 바이닐을 가장 직관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대개 LP는 12인치, EP(Extended Play)는 10인치, 싱글은 7인치 바이닐에 담긴다. DJ를 위해 혹은 프로모션 목적으로 활용도도 높이고 음압도 높여 제작된 싱글은 12인치 크기여도 LP가 아닌 12인치가 적절한 용어다.
사실 'LP 열풍'이라는 말은 새삼스럽다.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타이틀을 탈고 몇년 전부터 이 흐름이 반복적으로 조명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시장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MRC에 따르면, 작년 현지에선 판매량·판매액 부분 모두에서 바이닐이 CD를 누르고 '제1의 물리적 음악매체' 자리에 복귀했다. 2011년 미국 내 물리적 음악 매체 판매량에서 바이닐의 비중은 불과 1.7%였고, 나머지는 CD가 차지했다.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이 비중은 50.4%로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 팝스타 아델이 6년 만인 작년에 발매한 음반 '30'이 이끌었다. 이 음반의 바이닐은 첫 주에 10만8000장이 팔렸다.
올해 역시 바이닐 판매량 신기록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아델 기록은 이미 연이어 깨졌다. 지난 5월 영국 팝스타 해리 스타일스의 '해리스 하우스' LP가 18만2000장이 팔렸다. 특히 지난달 21일 발매돼 미국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정규 10집 '미드나잇츠'의 LP 한 주간 무려 57만 장이 팔렸다.
반면 국내에선 아직 정확한 바이닐 판매량 집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레코드페어에 모인 관객숫자가 바이닐 시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 업계에서 인식되고 있는 이유다. 김밥레코즈, 도프레코드, 널판, 서울바이닐 등 최근 바이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장들도 평소 음악 팬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올해엔 70여개 이상의 브랜드, 매장, 레이블, 개인들이 이틀간 판매·홍보 부스를 열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서울레코드페어 한정반과 최초공개반, 그리고 서울레코드페어 한정판 서적 등을 모두 합치면 총 50여종이 넘는 음반과 책이 서울레코드페어를 통해 처음 공개되고 판매되는 중이다.
김현철이 동아기획 시절에 발표한 음반 5장(정규 앨범 3장, 사운드트랙 2장)을 망라한 박스세트를 비롯 우효, 유라, 안다영, 김제형, 네스티요나, 만동, 불독맨션, 윈디시티, 이디오테잎, TRPP, 이문세, 강산에, 3호선 버터플라이, 오지호, 소유&긱스, 오렌지카라멜 & 10㎝ 등의 음반과 '모타운: 젊은 미국의 사운드' 등의 책이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처음 판매되거나 혹은 서울레코드페어에서만 판매되는 버전으로 선보인다.
물론 일반판 중에서도 흥미로운 바이닐이 많았다. 몇년 전부터 시티팝 열풍이 각광 받으면서 일본 시티팝에 대한 조명이 20대 사이에서 생겼는데, 1980~1990년대 일본 시티팝 바이닐을 찾는 젊은 세대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 이번 '서울 레코드 페어' 때부터 일본의 최대 아날로그 레코드 행사인 '레코드데이'(레코드의 날)와 협업도 시작했는데, 일본 80년대 시티팝을 상징하는 프리젠츠(PRESENTS)의 '필링 라이크 어 차일드(FEELING LIKE A CHILD)'는 바로 매진됐다. 발매 당시엔 소수만 공유했던 음악인데 40여년 만에 재발매돼 음악 팬들 사이에서 구입 1순위로 꼽혔던 음반이다. 서울 레코드 페어는 향후엔 일본 레코드데이와 양국간 발매작들을 교류하거나 한일 공동으로 음반을 기획하는 등의 본격적인 협업을 계획하고 있다.
기대작이 많았던 만큼 이날 문을 열기 전부터 1000여명이 넘는 음악 마니아들이 현장에서 줄을 섰다. 큼직한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온 음악 마니아들도 꽤 눈에 띄었다. 지역에서 첫 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음악 마니아들도 상당수였다.
그런데 국내 바이닐 업계 열풍의 걸림돌은 외부에 있다. 10년 넘게 고속성장해 온 세계 바이닐 시장이 인플레이션과 생산 설비·원자재 부족 등의 악재 앞에 숨을 고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닐 제작을 위한 원자재 등을 대부분 수입 물량에 의존해야 하는 국내 업계에선 고환율의 영향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체코 등지에 바이닐 제작 주문을 맡기면 기존엔 3개가량 기다려야했지만, 현재는 1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근엔 바이닐이 발매되면 무조건 한정판"(이주엽 JNH뮤직 대표)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정미조·최백호 등의 음반을 낸 JNH뮤직 이주엽 대표는 이번 레코드페어가 네 번째 참여다. 이 대표는 "저희 같은 경우는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좋은 음반 내줘서 고맙다' '정미조 선생님의 LP는 제가 좋아하는 음반' 등의 말씀을 해주셔서 뿌듯하다"면서 "특히 정미조·최백호 같은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에 놀랐다. 17일부터 예정했던 정미조 선생님의 음반의 예약 판매분이 이미 품절됐다. LP 팬들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음악 산업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만큼 네트워킹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 대표는 최근 LP 붐에 대해선 "미학적 쾌감"이라고 봤다. 그는 "LP 물성이 주는 묵직함은 CD를 소장하는 것과 다른 소장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있다"면서 "LP를 통해 음악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는 거 같다. 턴테이블에 올리고 들어야 하는 복잡함을 경건한 종교적 행위처럼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이름을 밝히지 않은 30대 초반의 음악 마니아도 "LP로 음악을 들으면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그 행위에서 오는 숭고함이 있다"고 했다.
멜론 인디음악 조명 프로젝트 '트랙제로' 등에 참여 중인 박준우(BLUC) 대중음악 평론가는 "어떤 형태로든 앨범·음악이 소비된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이라면서 "그런 흐름을 잘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서울레코드페어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제 11회 서울 레코드 페어'는 6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이어진다. 이태원 참사 애도에 동참하는 의미로, 쇼케이스·공연 등은 모두 취소했다. 대신 2층 구회의실에서 '바이닐 구입법/ 듣는법/ 보관법', '모타운 이야기 + 퀴즈' 등의 강연은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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