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인천공항이 카불공항 될 수도"
정의용 "아프간-한국 비교는 황당한 일"
탈레반 역사, 한미 관계 반추 계기 삼아야
현 시점 주한미군 철수 관측 현실성 없어
아프간 철군 후 미국 지위 변화 주목해야
초강대국 미국의 철수와 탈레반의 재등장에 국제사회는 충격에 휩싸여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타지키스탄으로 긴급 피난했으며 카불 주재 해외공관과 외국인들은 긴급 철수 중이다. 탈레반이 두려워 아프간을 떠나는 난민은 폭증할 전망이다.
아프간 소식은 멀리 떨어진 한국 국회에서도 화제였다. 보수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욕을 보였다. 아프간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뒤 수개월 만에 정권이 무너지자 국민의힘은 북한과 주한미군을 떠올렸다. 이달 초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우리 정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 사실도 자연스레 연결됐다.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은 "미국과 탈레반이 평화협정을 맺은 지 1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이 함락되는 것을 뉴스로 온 국민이 보고 있다"며 "카불공항의 참사와 탈레반의 아프간 대통령궁 무혈입성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매우 착잡하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많은 분들이 인천공항이 카불공항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어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판문점 선언 이후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며 "실질적인 비핵화가 해소되지 않은 설익은 평화협정은 오히려 평화를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 아프간 사태에서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당 김석기 의원은 "결국은 아프간도 미군이 끝까지 막아주지 못하고 철수를 했지 않냐"며 "주한미군은 영원히 대한민국에 존속하는 것이냐.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지금 여기저기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며칠 전에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 김여정이 김정은의 뜻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하라 주장하지 않았냐"며 "북한은 종전선언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까지 가겠다는 것 아니겠냐. 주한미군 없이 대한민국 안보를 확실히 지켜 낼 수 있겠냐"고 따졌다.
물론 주한미군 주둔 필요성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극도로 강조하던 국민의힘 의원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주장을 펴는 점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프간 상황에 준하는 한반도 안보 위기를 해결하려면 자신들이 집권해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을 하려다 스텝이 꼬인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국민의힘이 문재인 정부를 몰락한 아프간 정부에 빗대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격분했다.
정 장관은 정진석 의원에게 "아프간 사태와 관련해서 우리의 안보 상황과 비교하는 것은 황당한 비교라고 본다"며 "최근의 대한민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같은 허약한 정부는 아니다.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를 부패와 무능으로 몰락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비교를 하실 수 있냐"고 따졌다.
그는 또 "우리 정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됐을 뿐 아니라 확고한 안보관을 갖고 우리나라의 자체 방위력을 엄청나게 계속 증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8월19일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의 안보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연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정 장관은 국민의힘 지성호 의원에게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 그런 식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아마 국내 일부 인사들밖에 없을 것 같다"고 꼬집었다.
다만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아프간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 역사와 연상되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탈레반의 시작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한국 상황에 대한 시사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탈레반의 태동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아프간 집권자는 소련의 지원과 개입을 거부하는 사회주의자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이었다.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해 아민 정권을 몰아내고 친 소련 괴뢰 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자유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물론 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소련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인접국 파키스탄은 아프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소련에 저항할 세력을 육성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학생이나 청년이었기 때문에 '탈레반'이라고 불렸다. 탈레반이라는 말은 아프간 남부 파슈툰족의 말로 학생 조직이라는 뜻이다.
탈레반은 미국의 막대한 자금 지원과 파키스탄의 군사 훈련 지원을 바탕으로 소련에 저항했다. 결국 소련은 아프간 침공 10년 만인 1989년 철수했다.
소련 철수 후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한 탈레반은 다른 무장집단을 빠르게 제압하며 세를 키웠고 1996년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간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2001년 9월11일 3000여명이 숨진 9·11 테러 후 미국은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에 있는 것을 파악하고 탈레반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일축했다.
이에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군은 아프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단행했고 탈레반 정권은 그해 12월 축출된다. 아프간 국경과 파키스탄 등으로 도망친 탈레반은 다시 세력을 키워 아프간 정부군과 미군, 나토군을 공격했고 20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이 같은 아프간과 탈레반의 역사를 보면 한국 역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프간에서 탈레반을 키운 미국은 한반도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파 세력을 키웠다. 일제 패망 후 미군정을 통해 한반도 남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내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표방하는 이승만 정부의 수립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6·25전쟁과 한미동맹,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국을 지원함으로써 북한과 중국, 소련 견제에 활용했다.
탈레반이 미국에 반기를 든 것처럼 한국도 독자 행보를 시도했다. 탈레반이 스스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역대 한국 지도자들도 독자 노선을 걸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한미동맹에서 결정적으로 이탈한 적은 없다. 트럼프 미국 정부와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문재인 정부 역시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중 사이에서 균형추를 미국 쪽으로 옮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미국 역시 한국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매몰비용을 고려할 때 한국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참전 규모에서도 비교가 안 된다. 아프간에서 20년간 미군 2448명이 숨졌고 2만722명이 다친 반면 6·25전쟁 3년 동안만 미군 연인원 178만9000명이 참전해 3만3686명이 전사하고 9만2134명이 부상 당했으며 3737명이 실종되고 4439명이 포로가 됐다.
이 때문에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 이완을 예상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미국과 중국 간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냉전 시기 이래 최고 수준까지 올라가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아프간 사태 후 주한미군이 철수할지 걱정하며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에 변동이 생기는지를 살피는 주도면밀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아프간 철군의 후폭풍으로 지위가 하락할 경우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경쟁 중인 중국은 미국의 아프간 철군을 계기로 탈레반에 손짓을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파키스탄, 아프간, 이란과의 역학관계와 정세변화를 최대한 활용하며 중국-파키스탄-이란-아프간까지 이어지는 중장기 일대일로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경우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에 대응하는 중국 주도의 새로운 역내 질서가 구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국제정치적 함의' 보고서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단지 군사적 철수(pull out)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약화되거나 또는 반대로 부활하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지 모른다"고 짚었다.
박 위원은 "만일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사후 처리에 빠져 정작 중국 견제에 힘을 잃고, 중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채우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이란과 연합해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게 된다면 중동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또 다시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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