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 만주망명 110주년] ①좋은 세상 되거든 돌아오리라

기사등록 2021/03/18 06:00:00

1910년 조선 합병되자 독립운동 위해 만주 망명길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 앞장

학문과 혼인으로 연결된 수많은 경북인들 동참

석주 이상룡 선생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안동=뉴시스] 김진호 기자 =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구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한 지 올해로 110주년이다.

경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지역별 독립운동가는 경북 2292명, 대전·충남 1480명, 인천·경기 1438명, 부산·경남 1352명, 광주·전남 1295명, 전북 1077명, 강원 661명, 충북 537명, 서울 443명, 제주 191명 등이다.

구국지사들의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아 처절했던 경북인의 독립운동 역사를 조명해 본다.

18일 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경북인들은 의병운동과 척사상소운동, 혁신유림의 애국계몽운동 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펼쳤다.

이들 중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만주 망명길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 내앞마을의 백하 김대락 선생과 일송 김동삼 선생 등이다.

이들과 학문·혼인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경북인들도 동반했다.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등은 정재학파(정재 류치명-서산 김흥락, 척암 김도화, 서파 류필영 등)의 문도이면서 혼인관계로 공고히 이어져 있었다.

김대락의 누이 김우락은 이상룡 선생에게 시집을 갔고, 김대락과  사돈관계인 영덕의 평해황씨 해월헌 문중 일원(황호, 황만영, 황병일 등)도 망명길에 동참했다.

일송 김동삼의 제자였던 진성이씨 문중의 소근 이원일과 그의 집안(나중에 이원일의 딸 이해동은 김동삼의 며느리가 된다)도 합세했다.

일송 김동삼 선생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석주 이상룡의 사돈집안인 상주의 진주강씨 문중(강신종, 강호석 등), 매부 집안인 영덕의 무안박씨 문중(박경종 등) 등도 망명길에 참여한다.

학문적으로도 정재 류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정재학파의 문도들이 속한 문중도 대거 동참했다.

이상룡 형제와 김동삼 등도 김흥락의 제자였다.

김흥락의 세거지인 안동 금계의 의성김씨 문중(김익모, 김종락, 김연환, 김원식 등), 척암 김도화의 제자이자 서파 류필영의 아들인 동산 류인식과 전주류씨 집안, 예안 흥해배씨 문중(배승환, 배재형 등) 등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길에 합세했다.

'석주유고'를 보면 석주 이상룡은 강제 병합 소식을 듣자마자 송병준과 이용구의 목을 베라고 상소한 뒤 만한지도를 보며 망명길을 계획했다.

1910년 가을 무렵 김동삼과 김만식이 이회영과 주진수 등 신민회 인사들이 사전 답사로 다녀온 서간도 지역에 다녀왔다.

같은해 11월 주진수와 황만영이 찾아와 만주망명 계획을 전달받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김대락 등과 논의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어 제사 비용과 어머니 생활비, 문중 진휼금 등으로 사용할 재산을 남기고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도동서숙 학생들에게는 "정신을 보존하고 학업에 힘쓰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상룡의 재산 처분 과정은 만주망명 이후에도 계속됐다.

집안에서 전해지는 1913년 임청각 가옥 및 택지·산판 매매 증서나 각종 계약서가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처음에는 백하 김대락의 아들 김형식과 일송 김동삼의 제자 이원일이 선발대로 출발했다.

이후 1911년 1월 24일(음력 1910년 12월 24일) 김대락과 가족들이 만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석주유고'에 석주 이상룡은 음력 1911년 1월 5일에 출발했다고 돼 있으니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1년 2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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