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남표+기획자 김윤섭+영화감독 민병훈
나이 50, 인생의 변곡점서 '초심'으로 돌아가
기획자+감독, 화가 지원...1년간 제주서 '화가살이'
산 숲 바다에 들어가 현장서 작업...생동감 넘쳐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 아트프로젝트
청담동 아이프라운지+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화가, 전시 기획자(평론가), 영화감독이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하며 중얼거렸다. 3명 모두 반백살을 살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영화를 만들었다. 날마다 같은 날을 넘기며 밥 먹듯 일을 했다.
"내가 벌써 50이야~" 살아온 세월만큼 단단해질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로 가지 못했다.
2018년 겨울, 제주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은 무덤앞에서 말을 삼켰다. 죽음은 나이 순이 아니다. 가장 어린 영화감독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슬픔의 강을 건너고 온 탓이었을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화가가 화가 차듯 말하자, 영화감독이 설렁하게 말했다. "제주로 내려와"
전시기획자도 끼어들었다. "그런다면 집을 구해줄게"
한밤중 바람 소리는 거셌다. 창문은 바람에 멱살을 잡힌 듯 몇번씩 흔들렸다. 익숙함에 길들여진 지천명의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벌써 제주살이를 시작한 3명은 소년들처럼 낄낄댔다.
마침 제주 사는 영화감독 윗집이 비어 있었다. 얼결에 '집을 구해준다'고 말한 전시기획자는 말이 씨가 됐다.
"화가 한번 키워보자" 책임감은 연세(1년 월세)로 지불됐고, 화가는 결정을 해야했다. '가족은, 학교(강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덕지덕지 붙은 삶의 무게도 '화가의 길'에서는 녹아내렸다.
"진정, 그림만 그려보자"
2019년, 4월. 서울서 타고 다니던 자동차에 물감과 캔버스, 희망을 가득 싣고 제주행 배에 올랐다.
그의 작품 제목 '인스턴트 풍경(Instant Landscape)'처럼 즉흥적으로 시작된 제주살이는 1년간 이어졌다.
반백살에 흔들린, 화가 김남표(50)·전시기획자 김윤섭(51)·영화감독 민병훈(51) 이야기다.
제주에서 화가살이...김남표 "화가는 노동자다"
#중독된 세월의 독을 푸는 건 일상의 반복이다.초심. 가족을 떠나 나를 비우고, 화가의 새로운 습관을 채우자 두려움이 앞섰다.
매트리스에 성경책 하나. 텅빈 작업실은 의욕이 충만했다. 프랑스 파리를 떠나 시골 오베르에서 자연을 그렸던 고흐처럼 날마다 화구를 메고 산으로 숲으로 바다로 들어가 화판을 폈다.
"나가서 보니 대상이 보이지도 않고 그림도 안보이고 바람은 불고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죠."
예중, 예고, 미대를 거쳐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지만 스튜디오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야외에서 작업한 건 초등학교 사생대회 이후 처음이었다.
거친 굉음이 온종일 떠나지 않는 거대한 채석장부터, 온몸을 모기에 물어뜯기며 이름 모를 수풀(검질) 속을 뒤졌다. 거대한 환경에 맞게 제작한 대형 이젤을 들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여명과 낙조의 이미지에 심취했다.
땅거미가 지면 숙소에 돌아와 그림을 봤다. "그러면 뭔가가 아, 이거 내가 했나? 할 정도로 묘하게 선물을 받는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예술은 술로 풀었다. 민 감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 얘기들은 모티브가 됐고 용기가 됐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않아서, 모든 날이 좋아서 웃고 아파하며 그렇게 매일 즉흥적이고 새롭게 화가의 운명을 다졌다.
먹고 자고 그리고...그리고 먹고 자고. 제주에서 야생동물처럼 화가살이를 한 김남표는 "화가는 노동자"라고 했다.
"어떠한 목표나 계획을 하고 제주 작업을 시작한건 아니다." 제주 화가살이를 결심한 건 영화감독 민병훈 때문이다. 연민이었다. "혼자두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겪었지만 형이 겪고 있는 상황(부인을 사별한)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형을 보면서 옆에 있어주고도 싶었어요. 또 내가 다시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죠."
둘은 10년전 장흥아뜰리에서 만나 작업의 결이 맞은 '예술적 동지'다. "그림은 혼자 그릴수 있지만 환경의 변화, 영향들은 스스로에 영향을 줄수 없어요. 민 감독과 작업을 해오면서 운이 좋을 정도로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민병훈 감독은 화가의 길에 동행했다. 제주를 뒤져 풍경속으로 화가를 안내했고, 그 모습을 앵글에 그렸다. 그렇게 담은 장면으로 영화 '팬텀'을 찍었다. 김 작가가 아내와 사별한 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와 드라마가 섞인 영화다. 내년에 개봉한다.
"내가 보는 시각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 재미도 예술가들만의 재미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민 감독은 김남표의 그림에 대해 "그림을 보고 난 후 가슴이 먹먹하고 아림과 동시에 두근두근 떨려오기도 오랫만이었다"며 "그의 그림은 영화적"이라고 했다.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 '팬텀'은 화가 김남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가 그린 그림이 액자구성으로 보여진다. 김남표는 풀떼기 같은 화가다. 숲에 있어야 되지만 또 있으나마한 풀 같은 유연한 화가다. 그의 그림은 무언가의 너머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 관람객도 교감할 것으로 본다."
반백살 예술가 3인의 인생 변곡점...'지원+후원 아트 프로젝트 1탄'
#친구는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나는 경험이다."동지애였다."
화가의 제주살이 집을 구해준 김윤섭 전시기획자도 반백살의 묘미를 실감한 터였다. 정신없이 살다 느닷없이 다가온 암 선고에 세상이 깜깜해졌다. "무얼 하고 살았나. 무엇을 해야하나." 수술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인생의 앎'을 선사했다.
되돌아본 삶은 "늘 생각만 하다 끝났고 주춤거렸다." 화가 김남표를 보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 했다.
"갈등과 방황이 끝나고 재충전되어서 또다른 인생 2막이 되면 그 자체가 또 나에 대한 재충전이기도 하고,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판에서만 살아온 김윤섭 전시기획자는 마당발이다. 민병훈 감독과 친구로 화가들에 관심이 많은 민 감독을 장흥 아뜰리에에 소개하면서 민 감독은 김남표와 이어졌다.
김윤섭 기획자는 미술시장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정부의 미술품 가격 심의위원으로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심사했고 작품값을 산정하기도 했다. '빈익빈 부익부' 미술은 어느새 '돈'이 되어 잘팔리는 작가만 팔리는 시스템이 작동했다.
"미술품을 사치품으로 보는 것. 작품이기 이전에 상품을 만드는 것, 화가가 창작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전락되는 것이 안타깝죠."
김 기획자는 "창작자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건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이라며 "현재 우리 미술시장은 화가에게 술권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인기 상품을 쏟아내야 하는 생산자로 전락한 화가들의 현실은 인기 절정인 30~40대를 지나 50대에 이르러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데 재충전의 시기에 낭떠러지에 있다"며 "현실이 녹록치 않으면 자본 논리에 타협하고 안주하거나 주저앉는다"고 했다.
미술가는 생산력이 떨어지면 무직자다. 30~40대 미술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달려왔는데 빠르게 변하는 시장은 50대가 되면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 중견작가들의 무대가 적은 이유다. 작품값은 젊은 작가보다 비싸고 작품 변화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숨고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우울한 화가들이 50대다.
김 기획자는 "동병상련으로 나이 50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공감대가 아트 프로젝트로 이끌었다"며 "화가 김남표의 행보에 아낌없는 지원을 할 방법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트 프로젝트는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작가 인생 프로젝트"라며 "화가로서 어떻게 자신의 변별력을 개척해나가고 또 다른 가능성을 되찾으면서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를 위해 초심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례이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강남 청담동에 아이프라운지를 개관한 김 기획자는 지난 19일 김남표의 개인전을 개막했다. 아이프라운지와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호리아트스페이스(대표 김나리)와 함께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을 2개층에 나눠 전시하고 있다.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화가로 연기하지 않고 화가다워지려고 노력
#"나이 50은 큰 숫자는 아니지만 인생의 감정을 알게 돼고 그림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넣고 싶어하는 애틋한 마음이 있다."‘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은 화가의 새로운 설렘이 담겼다.
"이번 전시는 상황 설정부터 화가가 연기하지 않고, 화가 스스로 '화가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지점'에서 출발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고민하던 김남표는 제주도 검질(잡초 넝쿨의 제주 방언)에서 그림 인생의 변곡점을 발견했다.
"나무에 여러층이 섞여 있는 덩쿨은 오랫동안 추구한 질감이었다. 덩쿨을 그리자 내 그림을 보던 제주 사람들은 '검질을 그렸네'라고 하더라. 그 '검질'이라는 말이 내가 추구한 '감각의 질감'과 굉장히 와 닿는 뉘앙스였다."
붓 대신 손가락과 면봉으로 그리는 작가는 '검질'을 화폭에 옮겨놓은 듯 그려냈다. 이미 미술계에서도 '잘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이번 그림은 현장에서 느낀 감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스케치 없이 순간적으로 그려요. 붓을 사용하지 않고 면봉이나 비미술적 재료를 좋아합니다. 익숙한건 기술적 미감에 치중하게 하죠. 그래서 면봉을 주로 선호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유화작품 30여점(파스텔 기법 3점)이 선보인다. 호리아트스페이스는 10호에서 15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20여점이 전시됐다. 제주의 검질 풍경을 배경이지만 김남표의 상징중의 하나인 호랑이와 표범 혹은 얼룩말이 함께 등장한다.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 배경들은 상상에 의존한 것이 아닌 제주에서 보고 느낀 풍경이 담겼다.
아이프라운지에는 퍼즐처럼 대형 화면을 이루는 '셀(cell) 시리즈' 3점을 공개했다. 또 아이프안에 마련된 '그림 명상 스튜디오'에는 검질, 노을, 사슴 등이 등장하는 작품 3점이 조용히 걸려 명상을 통한 내면 바라보기’ 시간도 제공한다.
셀 작업은 ‘25×25cm’ 53조각으로 만든 '검질 풍경'(세로185×가로270cm), 68조각으로 구성된 야외 풍경(세로106×가로445cm), 84조각으로 완성된 올빼미 작품(세로185×가로320cm)은 일명 '쪼개기 공법'으로 나온 독창적인 기법이다. 제주 아외에서 사생할 때 물든 온 몸의 감각적 풍경을 조각조각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가의 분신술 같은 작품이다.
김 작가는 "검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보면 음습하다. 마치 우리의 삶을 이루는 하루하루가 ‘추상’인 것과 같은 이치 같았다"며 "하루하루에는 불편한, 치열함 부조리함이 있지만 전체 한 장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르는 마음이 미술적 언어로 가능하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셀(조각)작업은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는 풍광을 그린 구상 작품으로 보이지만 셀 하나 하나는 추상으로 변신한다.
이번 ‘김남표의 제주이야기’ 전시는 새로운 작품의 유통방식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유명작가의 비싼 작품을 투자 목적으로 여러사람들이 ‘쪼개서 구매하는 공동구매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김남표 작업의 '공동소장' 방식은 나눔과 지속의 연결고리로서 흥미롭다.
‘셀(cell) 시리즈’ 중 53조각으로 구성된 한 점을 공동소장 방식으로 판매한다. 40조각을 개인이 따로 따로 구매할수 있다. 나머지 13조각은 작가와 기획사 쪽이 보관한다.
구매자는 최소 1조각에서 최대 4조각까지 구매할 수 있어 최소 10명에서 최대 40명의 컬렉터 그룹이 형성된다. 이들에겐 전시를 기획한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의 지속적인 사후 서비스가 제공된다.
정기적인 작가와의 만남, 소장자 간의 멤버스 데이, 소장품의 교환 이벤트, 작가의 드로잉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팬클럽’ 역할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새로운 개념의 패트런(patron-후원)으로 작가와 소장가의 꾸준한 만남과 응원이 이어질 수 있게 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1년간 제주 화가살이를 하고 제주 작업이 전시까지 이어진 화가 김남표는 "요즘 더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림의 방향도 보이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걸 느낀다"며 "작가로서 이렇게 행복한 것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화가처럼 연기했던 부분들에 반성적 태도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 50이 되면 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햐 하는 시기지만 그 역시도 혼자는 불가능하다. 동료가 있어야 하고,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고유함보다는 질문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 어우러질수 있는 게 전시이다. 이젠 그것이 전시의 조건"이라고 했다.
뒤돌아 볼때 어른이 된다. 반백살이 넘어 찐우정을 발휘한 화가와 기획자 영화감독은 '일상의 위대한 힘'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 조각이 모여 일상이 되어 풍광이 되고 그렇게 어우러진 조화는 함께, 같이라는 상생의 미학을 전한다. 결국 내공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전시를 본 한 유명 미술 컬렉터는 "작가적인 힘이 느껴져서 보기 좋다. 예뻐서 잘 팔리는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작가다움과 무게감이 있어 독특해 사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전시는 12월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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