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대로]공무원 피살, 9·19군사합의 이행됐다면 없었을 비극

기사등록 2020/11/08 09:30:00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남남갈등 파장 지속

9·19 군사합의에 비극 예방했을 문구 여럿

북한이 9·19 합의에 부정적이라 이행 난망

[목포=뉴시스] 류형근 기자 =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사진=뉴시스 DB)   hgryu77@newsis.com

※ '군사대로'는 우리 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연재 코너입니다. 박대로 기자를 비롯한 뉴시스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군의 이모저모를 매주 1회 이상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지난 9월22일 서해 해상에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지도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씨가 북한에 의해 사살된 후 그 파장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씨 유족과 야당인 국민의힘은 죄 없는 우리 국민이 북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며 우리 군과 해양경찰의 책임을 추궁하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정부는 거액의 도박 빚 등 문제로 자진 월북한 이씨가 코로나19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북측의 반인륜적인 방역 조치에 의해 숨졌다고 보고 있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과 갑론을박 속에 급기야 우리 군의 서해 특수정보(SI)가 노출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북한의 군 통신체계 변경으로 이어졌다. 우리 군은 대북 감시망을 복구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공무원 피살로 인해 나타난 이 같은 난맥상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북한이 이미 합의했던 사항을 이행하기만 했다면 공무원 이씨가 소중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피살로 인한 소모적인 논쟁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 일명 9·19 군사합의를 보면 3조에 '남과 북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대책을 취해 나가기로 하였다'란 내용이 있다.

[목포=뉴시스] 류형근 기자 = 피격 실종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공무원이 승선해 있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10호가 사고 6일만인 27일 오후 전남 목포시 전용부두로 입항하고 있다. 2020.09.27.  hgryu77@newsis.com
3조 2항에는 '쌍방은 서해 해상에서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기로 하였다'라는 내용이, 3항에는 '쌍방은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에 출입하는 인원 및 선박에 대한 안전을 철저히 보장하기로 하였다'라는 문장이 담겼다.

남북한이 이 규정들을 이행했다면 공무원 이씨는 평화수역이나 공동어로구역 안에서 남북 양측에 의해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 및 평화수역 설정, 안전한 어로활동 보장'이란 제목의 9·19군사합의 부속문서에도 이씨 생명을 구했을 법한 내용이 다수 있다.

문서에는 '평화수역에는 쌍방의 비무장 선박들만 출입한다. 해군 함정들이 평화수역으로 불가피하게 진입하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경우에는 상대측에 사전 통보하고 승인 하에 출입한다'는 내용이 있다.

【평양=뉴시스】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박진희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군사합의문 서명식이 열리고 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군사 분야 합의문 서명식을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18.09.19. photo@newsis.com
평화수역이 조성됐다면 이씨가 북한쪽 해역에 갔을 때 북한 해군 경비정이 진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씨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사살되지 않았을 수 있다.

아울러 이 문서에는 '개별 인원과 선박, 함정, 항공기 등이 기관고장, 조난, 기상악화로 인한 항로미실 등 불가피한 상황으로 평화수역에 들어가는 경우 상대측에 연락 수단을 통해 즉시 통보한다'는 내용도 있다.

평화수역이 있었다면 이씨가 발견된 후 북측은 우리측에 이 사실을 통보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북측에 송환을 요구했을 것이다.

아울러 평화수역이 조성됐다면 이씨는 순찰대에 의해 발견돼 일찌감치 귀가했을 수도 있다.

[서울=뉴시스]박대로 기자 = 북한에 의해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 형 이래진 씨가 6일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서욱 국방부 장관 면담을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0.11.06.  daero@newsis.com
이 문서에는 '쌍방은 해경정(경비정)으로 남북공동순찰대를 조직한다. 공동순찰정은 250톤급 이하로 한다', '남북공동순찰대의 순찰정들은 공동어로구역 내로 진입을 금지한다. 다만, 공동어로구역 내 조난, 인명구조 등 긴급한 상황 발생 시에는 상대측에 통보 후 진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구가 실현됐다면 바다 위에 있던 이씨는 남북공동순찰대에 의해 발견돼 우리측으로 돌아왔을 것이며 이씨 가족이 지금처럼 고통을 겪는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북 접경지역에서 이씨 피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선 9·19 군사합의 이행이 필수적이지만 전망은 어둡다.

우리측은 9·19 군사합의 이행을 거듭 촉구하고 있지만 북측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북측은 북미 핵협상 중단을 이유로 9·19 군사합의 이행을 게을리 하고 있다. 나아가 북측은 지난해 11월 창린도 포 사격 훈련과 지난 5월 중부전선 감시초소(GP) 총격 등 합의 파기 사례까지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측은 북측에 9·19 군사합의 이행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지난 9월 취임한 서욱 국방장관은 첫 외부 일정으로 9·19 군사합의 이행 현장인 남북 공동 유해 발굴장을 찾았다. 서 장관은 지난달 3일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찾아 "앞으로도 JSA에서의 군사적 안정성이 지속 유지되고 남북 간 자유 왕래와 공동근무 등도 이뤄질 수 있도록 남북 군사당국이 9·19 군사합의 이행을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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