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서울수복때 수색작전 참가,김진석 예비역 하사
20세에 해병3기 입대, 1주일 굶으며 원산까지 진격
몸속에는 1·4 후퇴때 작전중 맞은 수류탄 파편12개
“빼면 죽는다고해 전사전우들 생각하며 벗삼아 지내”
중앙청 태극기 꽂은 해병3·4기는 모두 제주출신 군인
"6·25 참화를 겪고 지탱해 온 대한민국을 생각해야"
6·25 70주년을 하루 남겨 논 24일 오후 김석진(제주시 성화로·1952년 1월16일 하사로 제대)씨를 만났다. 김씨는 1950년 9월15일을 D-데이로 한 인천상륙작전 후 9월16일부터 전방수색부대로 활동했다. 그의 명함엔 이름 맨 위에 ‘1950/9.15 인천상륙/ 제주해병대 3기생 전상(戰傷)’이라고 씌여 있다. 한 눈에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부상당한 해병이라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1951년 1·4 후퇴할 때였지요. 우리 소대는 진해에서 모집된 해병대 5∼6기생들과 함께 경북 영덕에서 상륙해 괴뢰군 소탕작전을 할 땝니다. 강화도로 넘어가 화천 강 건너서 산에 올라갔는데 중공군을 만나 백병전을 벌였어요 소위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 때지요. 중공군은 총은 1개 분대가 하나정도 가졌고, 수류탄으로 전부 무장이 돼 있었어요. 나는 부사수 3명을 데리고 제주도의 묘지 같은 곳에서 ‘구구식 총’으로 겨누고 있었는데 옆에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터졌어요. 2명이 전사하고 나와 다른 2명은 부상을 입었지요. 20보 걸어가 쓰러져버렸지요”
김씨는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채로 춘천을 거쳐 홍천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까지 내려와 치료를 받았다. 이후 진해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중상자는 제주도로 보낸다”는 방침에 따라 제주농고(지금의 제주고) 마당에 설치된 해군 제3병동을 거쳐 부산 해군병원선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때까지는 파편이 몇 개가 박혀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당시 병원에는 x-레이 장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씨가 자신의 몸에 수류탄 파편 12개가 박혀 있다는 걸 안 것은 1995년 해군본부가 전상자들에게 신체검사를 권유한 후였다. 그동안은 몸이 무척 아픈데 파편이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디에 몇 개가 박혀있는지 모르고 지내오다 12개가 박혀 있다는 걸 x-레이를 통해 확인 한 것이다.
제주도 해병대 3기와 4기는 나이를 먹은 제주도민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들 모두 제주도민이고, 9·28 수복당시 서울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국기를 게양하는 대원 속에 이들이 있었다는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제주도가 대한민국 해병대의 발상지”라고 말한다.
김씨의 전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해병 3·4기생은 각 1500명씩 3000명이다. 이중 3기생에 경북 포항 지역주민이 3∼4명 끼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제주도민들이 전부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정의를 ‘인천상륙작전 직후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한국해병대, 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그리고 미 제7사단이 서울을 회복한 작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해병대라고 한다면, 적군이 점령해 있던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단 것이 제주 출신 군인들이 소속된 3기와 4기 해병대라는 얘기가 성립한다. 당시 해병대는 이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다만 “해병 3·4기에서 이 국기게양에 참여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 작전에는 내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 참여한 동기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 생존해 있는 3∼4기생은 240명 정도다. 거동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거의 80대 후반에서 김씨처럼 90까지여서 20∼30명이다.
김씨의 해병대 입대 스토리는 이렇다. 고향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씨는 20살이던 1950년 7월 정부에서 각 마을에 100가구당 1명씩을 군대에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김씨의 마을은 600가구여서 6명이 지원 했다. 하지만 김씨 혼자 합격한다.
김씨는 그해 8월5일 모슬포훈련소에 입대하고 1연대 3대대 11중대 1소대에 소속된다. 이윽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고 전방수색부대인 3대대 11중대에 편입돼 9월28일 서울 탈환 후 인천에서 원산, 평안남도 양덕까지 종횡무진하면서 수색작전에 참여한다. 이 작전 중 일주일을 굶어 보급품을 받으려고 이동하다가 분대장과 병장이 전사하는 모습도 봐야 했다.
“당시 적군은 아군을 포로로 잡으면 나무에 매달아 놓고 검술연습을 했어요. 인간으로서는 정말 할 수 없는 짓을 한 거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6·25 전쟁의 참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피 흘리며 싸운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피폐한 국토, 굶주리며 피난을 가야만 했던 사람들,수 많은 전사·상자들…이 참화를 겪으며 지탱해 온 대한민국을 생각해야 합니다.”
김씨의 톤이 높아졌다. “6·25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kjm@newsis.com, ktk280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