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지시 계기로 박지원묘 등 정비
조선시대까지도 특별 관리된 문종 경릉
지난해 촬영된 최근 모습 단독 공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0. 고려의 찬란한 문화황금기 연 문종(文宗)의 경릉(景陵)
개성 남대문 앞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고려 도성을 둘러싼 개성성의 옛 숭인문(동대문) 자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동쪽의 장풍군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2km 쯤 가면 북쪽으로 ‘황토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나오고, 이 언덕 아래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1959년 비석이 발견되면서 위치가 확인됐고, 2000년에 북한이 봉분을 새로 쌓고, 비석과 석물 등을 정비했다.
1999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지역의 군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빛낸 명인들을 다 잊은 것 같은데 부대 주둔구역 안에 있는 역사유적과 유물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근의 박지원묘와 황진이(黃眞伊)묘가 다음해에 복원, 정비됐다고 한다.
황진이 묘는 박지원 묘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더 가면 있다. 조선 중기의 기생이던 황진이는 “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 속에다 장사 지내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언대로 그의 무덤은 개성에서 장풍군으로 가는 도로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황진이 묘 뒤쪽 산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고려 15대 숙종(肅宗)의 영릉(英陵)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봉우리 하나를 넘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숙종의 부왕(父王)인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이 있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다.
경릉은 해발 400-500m의 비교적 높은 골짜기(경릉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선적저수지와 광종 때 세운 불일사(佛日寺)터가 있다.
조선의 명군(明君)으로 세종(世宗)이나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손꼽힌다면, 고려의 훌륭한 군주로는 문종을 들 수 있다. 그의 치세는 고려인들이 태평성대라 불렀음은 물론, 송나라에서도 문종이 훌륭한 임금이었음을 기록하였다.
문종은 고려의 11대 임금으로 8대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이고, 이름은 왕휘(王徽)이다. 현종 사후 차례로 즉위한 덕종(德宗)과 정종(靖宗)의 이복동생으로, 형인 제10대 정종(靖宗)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해 1046년(정종 12) 왕위를 계승했다. 현종 이후에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 셈이다.
문종때 고려는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평가한다. 문종은 신라 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해 창조적 고려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불교·유교를 비롯해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뤘다.
고려 말의 유학자인 이제현(李齊賢)은 “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버지가 일으키고 아들들이 계승하며, 형이 죽으면 아우가 뒤를 이어서 시작에서 끝이 거의 80년이고, 가히 전성기라 이를 만하다”라고 평했다.
문종은 몸소 절약에 힘쓰고, 현명하고 재주 있는 자들을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였고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했다고 한다.
이제현은 “대창(大倉)의 곡식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였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세라 불렀다"고 썼다.
송(宋)은 매년 왕을 포상(褒賞)하는 글월(命)을 보냈으며, 요(遼)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동쪽 일본(倭])은 바다를 건너와 진기한 보물을 바쳤고, 북쪽 맥인(貊人)은 관문(關門)을 두드려서 토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라며 문종의 치세(治世)를 높이 평가했다.
문종은 1019년(현종 10년)에 태어나 1083년(문종 37년)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였다. 65세에 사망했으니 장수한 셈이다. 자녀로는 그를 이어 즉위하는 순종(順宗)과 선종(宣宗), 숙종(肅宗) 등 여럿을 두었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역시 그의 아들이다.
『고려사』에 “왕이 1083년(문종 37년) 7월 신유일(辛酉日)에 죽자 8월 불일사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경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직할시 선적리(옛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이다.
경릉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에 공덕이 많은 왕으로 여겨 특별히 ‘숭의전’에 배향하여 제사를 드렸으며, 능 또한 특별히 관리했다.
그러나 경릉은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년) 사이에 다른 고려 왕릉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도굴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이를 수리하고 치제(致祭)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고종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난간석의 일부가 소실되고, 정자각도 사라진 것이 확인된다. 2019년 가을에 촬영한 사진과 비교해 보면 외형상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 때 세운 능비는 사라졌고, 2단의 문인석은 두 동강 나 윗부분이 사라졌다.
능역은 남향으로 조성됐고, 원래 3단으로 조성됐으나, 현재는 봉분이 있는 1단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2단에는 위 부분이 잘려나간 문인상 3개만 남아 있다.
1963년 북한 학계의 조사로는 봉분 주위에 곡장(무덤 뒤에 둘러쌓는 담)이 130cm 높이로 둘러져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63년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2.3m, 폭은 8m였다.
1982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주검 칸(석실)의 크기는 가로 3.63m, 세로 2.9m, 높이 2.25m이다. 주검 칸의 내부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천정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고, 바닥 중심에 관대가 있었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도금활촉 4점, 도금장식품 1점, 옥장식품 1점, 지석 10여 점, 관못, 고려자기 조각들이 나왔다.
문종의 경릉은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10km, 판문점에서는 북쪽으로 불과 6km 거리에 있다. 인근의 숙종의 영릉, 박지원 묘, 황진이 묘 등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