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서는 본인과 법정 대리인만 쓸 수 있어
비혼 추세 확산하는데…여전히 가족만 허용
프랑스·미국·독일 등 선진국은 '제3자' 가능
총리실, "법 근거 만들라"고 복지부에 권고
[세종=뉴시스] 김진욱 기자 = "의사는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발생하게 할 우려가 있는 수술을 하는 경우, 이를 환자(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 환자의 법정 대리인)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의료법 제24조의 2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병원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모든 의학적 처리를 주치의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동의서를 수술 전에 환자에게 받는 것은 이 의료법 조항 때문이지요.
법정 대리인은 '법정 대리권을 갖는 자'입니다. 미성년자의 친권자·후견인 등이 이에 해당해요. 성인이 되면 (금치산자나 한정 치산자가 아닌 한) 법정 대리인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성인은 수술 동의서에 본인이 직접 서명해야 하지요.
날짜를 받아 둔 계획된(?) 수술이라면 간단합니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동의서에 본인이 직접 서명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성인이 사고 등을 당해 의식이 없는 채로 병원에 실려 오는 경우입니다. 본인의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데 법정 대리인마저 없으니 동의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병원은 가족 등 환자의 보호자에게 동의서를 받습니다. 앞서 일러드린 대로 성인의 가족은 법정 대리인이 될 수 없지만, 의료법을 관장하는 보건복지부는 피치 못한 경우였다는 점을 고려해 이를 유권 해석 형태로 용인해왔어요.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이 보호자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민법상 부양 의무자에 해당하는 ▲직계 존속(부모·조부모·외조부모) ▲직계 비속(자녀·손자녀·증손자녀) ▲배우자 ▲생계를 같이 하는 친족 정도로 말이지요.
이 때문에 동성 파트너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 등은 위급한 상황에 놓인 연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10년을 같이 살았든, 20년을 같이 살았든 법적으로 연결돼 있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법조계에서는 "의료기관에서 보호자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히는 바람에 환자의 선택권이 침해되거나 적정한 진료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시민 연대 계약), 미국(지역 파트너십), 독일(생활 동반자 관계) 등 국가에서는 이미 제3자도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있어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비혼주의가 확산하는 현 세태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에 "법정 대리인이 없는 환자가 자신을 대신해 수술 동의 등을 할 수 있는 대리인을 사전에 지정할 수 있도록 의료법에 근거를 마련하라"는 권고가 지난해 말 복지부에 전달됐습니다.
이는 국민 제안, 대국민 공모전 등을 통해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이 발굴한 과제예요. 국무총리실 소속 소비자정책위원회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복지부는 이 대리인의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하는 것이 좋을지 의료 현장과 환자 단체, 소비자 협회 등의 의견을 듣겠다고 하네요. 제3자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는 날이 한국에도 올까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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