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종의 ‘문화소통’
본래 우리나라의 말소리 전체를 적어낼 수 있도록 세종대왕에 의해 고안된 훈민정음 28자 체계는, 불행히도 일제 때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1930)’에 의해 언문 24자 체계로 왜곡·손상됐다. 그 이래 나라의 땅은 광복(1945)됐으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자 우리 문화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은 아직 그 빛이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비록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열망은 강했을 지라도, 살아생전 한 번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접하지 못해 자의적 ‘뇌피셜’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연구자들과, 1940년 이후 해례본을 보았을지라도 그 일부 중요 문구들을 오해하고 곡해한 ‘권위’의 국어학자들로 인해 아직 훈민정음의 진의는 현대한국인들에게 완전하게 소통되지 않고 있다.
세종의 뜻을 가장 잘 알아차린 학자들 중 한 명인 신숙주는 ‘동국정운(1447)’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는 그 청탁의 분별이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 한자음만은 유독 탁성이 없으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을 손가? 이는 청탁이 변한 것이다.” 훈민정음에서 청성(淸聲)은 ‘빠르고 짧은 소리’를, 탁성(濁聲)은 ‘느리고 긴 소리’를 의미한다.
신숙주의 위 말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토속어에는 청성과 탁성이 구별되어 존재했지만 한자음은 탁성이 모조리 청성으로 변하여 사라진 관계로, 정확한 의사소통과 구별을 위해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써 조선한자음의 탁성을 복원하였다는 말이다. 세종이 ‘大(대)’와 ‘韓(한)’의 한자음을 긴소리 ‘때’와 ‘ㆅㅏㄴ’으로 복원한 덕분에, 57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大’와 ‘韓’을 동국정운에서처럼 장음으로 발음하고 있다.
신숙주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나라 말소리에도 세종 때와 다름없이 하늘아(•, 속칭 ‘아래아’), 반치음(ㅿ), 후설모음의 목구멍소리(ㆆ: 속칭 ‘여린히읗’), 콧소리성 어금닛소리(ㆁ), 순경음(ㅸ)이 매일 발성되고 있는데도, 글자로는 쓰이지 않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이는 일제의 ‘언문철자법’ 이후 훈민정음이 왜곡·손상된 것이다.
현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사진>에서 보듯, ①‘ㅏ’와 발음이 구별되는 훈민정음 제1번 중성 ‘•’자는 그 음가가 잊힌 채 구별 없이 ‘ㅏ’자로 쓰이고 있다. ②‘ㅅ’과 구별되는 반치음 ‘ㅿ’은 ‘ㅅ’으로 쓰이거나 ‘ㅇ’으로 변음 됐다. ③세종 당시 토속어음을 적을 때는 ‘ㅇ’과 통용되었으나 한자음을 적을 때는 ‘ㅇ’과 구분되었던 ‘ㆆ’은 지금, 한자어·토박이어할 것 없이 모두 ‘ㅇ’으로 쓰이고 있다. ④영어 ng 소리에 해당하여 분명히 ‘ㅇ’과 구별되는 어금닛소리 ‘ㆁ’자는 현재 구별 없이 목구멍소리 ‘ㅇ’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⑤‘ㅂ’과 구별되는 입술 가벼운 소리 ‘ㅸ’은 현대한국어에선 ‘ㅂ’자로 쓰이거나 ‘ㅇ’으로 변음 되었다.
이처럼 글자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으나, 그 본래 소리들은 세종 때와 똑같이 지금도 전국에서 발성되고 있으니 이 부조리를 어찌할 것인가? 그 빠진 글자들이 복원될 때, 우리말과 글은 일치돼 세종이 염원했던 진정한 문명국이 이뤄질 것이다. 회고해보건대, 한 고문자 연구가가 우연히도 고전(古篆)에 대한 이해가 관건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말귀를 알아듣고 훈민정음의 실체를 엿보게 되었으나, 그것은 기쁨임과 동시에 고통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어학회 33인 중 한 분인 신현모(신윤국) 선생 손자의 큰 도움으로, 일단은 사라진 네 글자에 대한 실상을 언론에 알릴 수 있었다. 소통이 쉽지 않은 글임에도 호응과 격려해주신 분들께 참으로 감사하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heobul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