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77)의 '시 없는 삶'에는 느림의 미학이 느껴진다. 다양한 장르의 문학 실험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던 한트케는 자유로운 시상을 마음껏 펼쳤다.
편집자 울라 베르케비츠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시집은 1960년 후반부터 1986년까지 쓴 시들을 한트케가 다시 배치한 모음집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잠들 때 내가 깨어난다:/ 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를 본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발밑의 바닥이 나를 움직인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본다;/ 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발음한다;/ 창문으로 가면 내가 열린다'('전도된 세계' 중)
'뭐라 설명할 길 없는 어느 차가운 날,/ 환해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고/ 눈이 떠지지도 감기지도 않고/ 익숙한 풍경이/ 예전의 친숙한 세계를 불러내지 않으며/ 그렇다고 새로운 세계의 광경을 본다는 느낌도 없는,(세계에 대한, 둘이면서 하나인 시적인 감정)/ '만약'이라든가 '그러나'가 없고/ '그때는' 이라든가 '그 다음엔'도 없는,/ 여명은 지났지만 저녁은 아직 상상할 수 없고/ 묵묵히 서 있는 나무에서 아주 가끔씩만/ 마치 가벼워진 듯 가지가 튕기는, 이런 뭐라 설명할 수가 없는 날,/ 거리에서 한 발 두 발 걷는 사이에/ 갑자기 의미가 사라져버린다'('무의미와 행복' 중)
1960년대 기성 문단을 비판하며 등장한 20대의 작업부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 작업을 한 40대 초반에 이르는 20여년간의 여정을 만나볼 수 있다.
세상은 불공평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 모든 인간은 늙고 병들며 결국 죽는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고 하면 힘들어질 뿐이다.
나쁜 일도 지나가기 마련이고 좋은 일도 붙잡을 수 없다. 한트케는 삶이 덧없는 것 같지만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강조한다.
'올해 가을 시간은 나 없이 흘러갔네/ 생은 조용히 정지하여 있고, 그 시절/ 우울을 이기려 타자를 배우던 때처럼/ 저녁이면 창문 없는 대기실에서 수업을 기다렸지/ 네온등은 물밀듯 넘쳐들었고/ 타자시간이 끝나면 비닐커버는 다시 타자기 위에 덮였네/ 그렇게 갔다가 그렇게 돌아왔고 나는/ 자신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을 듯 했지/ 자신에 몰두했고 그런 사실마저 자각했지만/ 절망이 아니라 오로지 만족스러웠네/ 자신에 관한 아무런 느낌도 없이/ 타인에 대한 느낌도 없이/ 걸었고, 망설이며 배회하다/ 자주 걸음걸이와 방향을 바꾸었지('시 없는 삶' 중)
조원규 옮김, 읻다(ITTA), 320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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