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이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혁명간부학교)였다.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린 이곳은 중국 국민당 정부 등과 설립을 위한 교섭이 진행되다가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가 도쿄와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키면서 추진이 수월해졌다.
보안을 위해 난징 교외 탕산(湯山)에 있는 산츠먀오(선사묘)에 자리 잡은 혁명간부학교는 중국으로부터 경비를 지원받고 의열단이 운영을 맡았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이었다. 이 학교의 설립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당시 의열단에게는 한국 독립이 우선이지만 만주를 침략한 일제로부터 이를 탈환하는 것도 과제였다.
혁명간부학교는 기수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졸업생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조선운동사, 한글, 역사 등을 비롯해 조직방법, 비밀공작법과 사격술, 폭탄제조법과 사용법, 실탄사격, 부대교련, 보병체전 등이 수업 과목이었다.
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김원봉과 윤세주 등 교관들에게 특별공작 임무를 받고 적의 후방으로 떠났다. 중국 측에서는 만주지역 활동을 바랐으나 졸업생 대부분은 독립투사로서 위험한 조국으로 돌아가 활동하기를 바랐다.
1933년 7월14일 혁명간부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명이 활동자금 80원을 받고 길을 떠났다. 그는 상하이를 거쳐 안둥으로 가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그곳에서 다시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5~1944)였다.
우리에게 '광야', '꽃', '청포도' 등으로 알려진 민족시인 이육사의 본명은 본래 이원록(李源綠), 이원삼(李源三)이었다. 1905년 경북 안동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 이황 14대 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어릴 때 원록이나 원삼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이활(李活)로 이름을 개명한다. 익히 알려진 아호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비롯됐다.
일제에 모두 항거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여섯 살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웠으나, 열두 살 무렵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고향 원촌을 떠나 안동군 녹전면 신평리로 이사를 했다. 이 무렵 보문의숙(寶文義塾)에서 공부했으며 1919년께 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1회로 졸업했다.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던 선생은 1924년 4월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이후 도쿄 쇼오소쿠(東京正則) 예비학교와 니혼(日本)대학 문과전문부 등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경찰기록으로 검찰신문조서에는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에 1년간 재학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25년 1월 건강문제로 귀국했으며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특히 이 시기 의열단원이었던 윤세주 의사의 의열 투쟁에 큰 감화를 받고 형 이원기와 동생 이원유 등과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일본과 중국(북경)을 오가며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정보를 입수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윤세주 의사는 국내에서 총독부 요인 암살, 기관 파괴를 기도하고 무기를 국내로 밀반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형, 아우 등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돼 2년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었던 까닭에 호를 육사(陸史)로 짓게 됐다. 당시 일제는 선생의 형을 사건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온갖 고문을 가했다.
석방 후 이듬해인 1930년 1월3일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란 본명으로 첫 시 '말'을 발표했다. 광주학생학일운동이 일어나고 1월10일 대구청년동맹 간부로 붙잡혔으나 19일 풀려났다. 같은 해 2월 중외일보 대구주재 기자로 임용됐지만 3월에 대구경찰서에 다시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1931년 1월에는 대구 격문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다시 옥고를 치른 후 3월 석방됐다. 이후 만주를 자주 드나들었으며, 8월부터는 조선일보사 대구지국에서 근무하게 됐다.
선생은 1932년 3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만주 펑톈(선양의 옛 명칭)을 거쳐 베이징에서 윤세주 의사를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의열단 간부학교로도 불린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정치조에 소속돼 교양과목과 군사학 등을 교육 받았다.
1933년 4월20일 혁명간부학교 제1기 졸업식에서 식후공연 '지하실'의 대본 작성과 연기를 맡았으며, 졸업식 이후 국내 노동자·농민에 대한 혁명의식 고취와 2기생 모집 임무를 부여받았다. 아울러 국내에서 '대중' 창간 임시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을 게재했다. 같은 해 5월 상하이로 이동,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魯迅)과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이어 7월에 국내로 잠입해 항일활동을 하던 중 이듬해인 3월 혁명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면서 경기도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됐지만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됐다.
1937년에는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고 대표작 '청포도', '교목', '파초' 등 상징적이고 서정성이 풍부한 시를 발표했다. 이어서 '조광', '풍림', '문장선', '인문평론'등의 지면을 통해 1941년까지 '절정', '광인의 태양' 등 수많은 작품을 게재했다.
1941년 가을 폐질환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선생은 1943년 4월 충칭(중경)과 옌안(연안)으로 건너가 국내로 무기를 반입해 일제와 싸우고자 했으나 7월 초 어머니와 형의 소상(돌아가신 후 첫 번째 제사)을 치르러 잠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며칠 후 북경으로 압송됐고 북경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이듬해인 1944년 1월 16일 새벽 39세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이었던 이병희가 수습해 화장했고, 다섯째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1960년 고향 원촌의 뒷산으로 옮겨졌다.
1946년 넷째 동생 이원조에 의해 서울출판사에서 유고집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발간돼 그의 작품 20여 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서문은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이 썼다. 같은 해 조카 이동영에 의해 범조사에서 간행된 '육사시집' 재간본에는 초간본에 2편을 더한 22편의 시가 소개됐다. 서문은 청마 유치환이 썼다.
선생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이었다.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생애 전반은 총칼로, 생애 후반은 펜으로서 일제에 맞선 선생은 조국 광복과 독립을 향한 꺼지지 않는 열정과 의지를 보여준 진정한 항일투사였다.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ksj8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