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 인터뷰]한영실 교수 "음식 나눈다는 것, 숭고한 큰 사랑"

기사등록 2019/05/31 11:41:14

궁금, 궁금한 금요일

한영실 교수 ⓒ숙명여대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사람은 그리움과 추억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 만의 경험과 각기 다른 기억을 간직하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그리움은 '엄마의 밥상'이 아닐까.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원하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편리함과 풍요로움 속에서도 더욱 그리워지는 건 매일 똑같고 지루했지만 언제나 맛있었던 엄마의 밥이다. 이유가 뭘까.

한영실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음식을 먹는 것은 정을 먹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의 기억은 그리움의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습니다. 그 속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한 치유의 힘이 있지요"라고 짚었다.

식생활 관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노인 인구가 730만명을 넘었습니다. 2025년이면 노인인구의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됩니다. 평균수명이 85세가 넘는데, 문제는 65세이상 노인인구 중 3분의 2 이상이 병을 안고 사는 유병기간이 15~20년이나 된다는 겁니다. 올해 우리나라 총예산이 469.6조원인데 국민의 의료비 지출 총액은 100조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막대한 의료비 지출은 개인의 가계문제를 떠나서 국가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표정과 말투에서 절절함이 묻어났다. "당뇨, 순환기계 질환 등을 비롯한 노인층이 겪고 있는 질병은 대부분 생활습관병입니다. 잘못된 식생활이 주원인이고 꾸준한 식생활 관리가 질병의 예방과 치유에 큰 도움이 되지요.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5 컬러스 어 데이(하루에 다섯가지 색을 가진 식품 섭취하기)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했어요. 이를 통해 질병예방과 복지예산을 줄이는 데도 큰 효과를 본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모든 국민들을 위한 식생활교육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면 합니다."

한 교수는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을 밟았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장, 산학협력단장, 사무처장, 교무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최연소 총장으로 당선돼 제17대 숙명여대 총장을 역임했다. 한국음식연구원장을 맡으면서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21개국 정상들의 만찬 메뉴를 자문·감독했다.
3년 반 동안(2004년2월~2007년7월) KBS 2TV '비타민'의 '위대한 밥상' 코너로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비타민 교수'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 교수는 방송 출연이 "굉장히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땐 부담감에 사양했어요. 그런데 '1년에 100명도 채 안 되는 학생들에게 영양교육을 시키고 있잖아요. 방송을 통해 전 국민에게 영양교육, 식생활 정보를 전파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라는 설득에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어려운 식품학 내용도 알기 쉬운 용어로 잘 설명해줬다. 그 덕에 2006년 제8회 KBS 바른언어상 TV진행 부문과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식품에 들어있는 성분, 효능 등을 설명하면서 가급적 어려운 식품학적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것보다 이런 식품이나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 실제 예를 들어 쉽게 설명했습니다."

'위대한 밥상'은 건강 밥상 열풍을 일으켰다. 일요일밤 방송에서 한 교수가 언급한 식품은 월요일 오전부터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다보니 미리 무슨 식품을 할지 알려달라는 요청도 끊이질 않았지요. 행여 방송 아이템이 미리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히 신경썼어요. 방송용 음식을 만들고 남은 재료나 쓰레기도 방송사에 버리지 않고 싸들고 올 정도였습니다. (웃음)"

방송을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일까. "방송 주제로 우리 농산물을 식품재료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한 번은 수입과일량의 증가와 귤 농사의 풍작으로 제주 귤농가가 귤을 땅에 묻어 버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급히 귤의 영양과 귤을 이용한 요리를 주제로 방송했습니다. 완전 히트를 쳤고 제주도지사님으로부터 명예제주시민 위촉 제의까지 받았지요. 제 방송을 보고 귤을 사 준 국민 여러분들이 고마웠어요. 식품영양학자로서의 사명감을 크게 느끼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한국전통식품을 전공한 학자로서의 고민이 컸다. 2003년 국내 유일의 대학부설 한국음식연구원을 열었다. "우리 음식의 진정한 세계화는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학생들 교육도 그렇고 한국음식의 전파도 꽃꽂이를 하는 마음으로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 핀 꽃을 꽂아 놓으면 처음엔 화려하고 예쁘죠. 하지만 뿌리 없는 꽃은 금방 시들어 버려요. 한국 음식의 세계화도 교육의 일환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처음엔 더디고 힘들고, 싹을 틔우기가 힘들지만 긴 호흡으로 시간을 갖고 땅을 잘 갈고 실한 씨앗을 하나하나 하나 심고 정성으로 가꾸면 반드시 답을 받게 됩니다. 대를 이어 오래 오래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꽃 화분을 잘 가꾼다"고 한다. "20년된 행운목이 세 번이나 꽃을 피웠구요, 오래 전에 받은 난 화분도 계속 꽃을 피웁니다. 사람들은 비결이 뭐냐고 묻지요. 특별한 비법은 없어요. 다만 저는 꽃에 물을 줄 때 '목마르지? 내가 물 줄게. 참 예쁘다 고맙다'며 꽃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사랑한다'며 잎을 만져 주기도 합니다."
한국음식연구원장으로 뛰며 미국, 프랑스, 일본, 터키, 중국 등 30여국에서 우리 음식 전시회를 개최했다. 우리 음식과 상차림을 선보인 한 교수는 최근 동남아시아 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1인 국민총생산(GNP)은 낮지만 인구도 많고, 농산물 생산이 풍부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외식 시장과 가정식대용 편의식품(HMR) 시장이 커지는 등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베트남에 있는 회사의 이유식 연구·개발을 맡았습니다. 우리 제품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신뢰를 주고 어릴 때부터 우리 음식에 익숙해지면 계속 한국음식의 고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제가 다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이렇게 씨를 뿌려 놓으면 후배 연구자와 개발자들이 대를 이어 갈거구요. 우리음식의 전파도 큰 나무를 키우는 마음으로 하고 싶어요. 나무는 잘 심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잘 큰답니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식품 개발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한 교수의 맞춤식품 연구실은 GS25와 손잡고 다양한 편의식품을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칼로리 수치를 전면에 내세운 '99㎉ 한 컵 샐러드'를 내놓았고 최근엔 하루에 단백질 필요량을 100% 충족시키는 '단백질 샐러드'를 개발했다. 이달에는 흑미가 포함된 잡곡밥에 육류, 채소류, 달걀 등 영양 배합을 맞춘 12가지 반찬이 들어간 '왕의밥상 도시락'을 출시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했지만 30여년 넘게 직장과 집안일을 병행하면서 가장 힘든 게 음식을 만드는 일이에요. 음식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알기에 저는 김밥 한 줄을 먹더라도 식품 재료부터 요리, 배달까지 애써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습니다. 이제 이미 집밥보다는 외식, 그리고 간편식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는데요. 사먹으면서 항상 드는 생각이 있지요. 영양적으로 충분한가, 위생적으로 안전한가, 재료나 조리 과정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과 의문이 편의식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재료, 만드는 방법, 영양적 밸런스, 용기의 안전성 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연구원들이 제조사도 수시로 방문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올바른 식생활의 실천이 건강을 지키는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 연구실 이름이 맞춤식품 연구실입니다. 당뇨·고혈압 등 질병에 따른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식품과 음식을 알려주고, 어린이·수험생·임신부·노인 등 생애주기에 따른 적절한 식품 정보를 제공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때이른 질문이지만, 정년 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실컷 놀고 싶어요. 하하. 음식을 나누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동물은 먹이를 두고 다툽니다.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먹을거리를 나누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입니다.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과 많은 얘길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배고픈 어린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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