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식량지원 이뤄지면 북미 핵협상 재개 가능성↑

기사등록 2019/05/08 11:36:05

'북한 도발 판 깰 생각 아니다' 한미 판단 작용

김연철 장관 개성 방문때 지원협의 타진할 듯

핵협상 재개땐 '단계적, 장기적 해결' 불가피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하고 있다. 2019.05.07. (사진=청와대 제공)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강영진 기자 =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악화해온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흐름을 탈 조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7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대북 식량지원에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계기다.

그러자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8일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방문했다. 김장관의 방문 목적은 명목상 연락사무소 격려 차원으로 발표됐지만 실제로는 대북식량지원을 논의하는 남북협상 개시를 북한에 타진하려는 행보일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극적인 국면 전환에 북한의 '발사체 도발'이 먹힌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미가 북한의 '도발'이 판을 깨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다고 판단하고 상황을 개선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한 것이 큰 흐름이다.

 지난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반발의 수위를 높여왔다. 서해 로켓 발사장을 복원하다가 중단한 북한은 3월15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 기자회견, 4월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4월 중순 외무성 북미국장과 최선희 제1부상의 기자회견 등으로 미국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지난 3일 동해로 20발 이상의 발사체를 발사하는 '도발아닌 도발'을 감행했다.

북한이 '도발'하기까지에는 미국이 북한을 자극한 측면도 있다.

언론을 상대로 북한과 신경전을 벌이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달초 "협상을 통한 해결이 불가능해질 경우 미국도 분명히 경로를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자 최선희 제1부상은 "경로 변경은 미국만의 특권이 아니다"라고 받아쳤고 곧이어 발사체 발사를 감행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감독하는 가운데 수십발의 다연장로켓포를 발사하면서 북한은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도 끼워넣었다. 유엔 제재는 북한이 모든 형태의 탄도미사일 발사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발사했으니 한순간에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도박성 도발'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도발 의도'를 면밀히 분석한 한미는 격앙된 반응을 자제하고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막았다. 폼페이오 미국무장관은 북한이 발사한 것이 미 본토를 사거리로 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정한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발언했으며 트럼프 대통령도 “김 위원장은 내가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합의는 성사될 것”이라고 트윗했다. 

당초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던 한국 국방부는 뒤늦게 미사일이 아닌 발사체라고 수정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는 것을 막으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야당의 비판이 거세지고 일부 여론이 오히려 악화했지만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촉발되는 것을 예방하려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한미 양국이 이처럼 절제된 반응을 한 것은 북한의 도발이 철저한 계산 아래 이뤄진 것이며 아직 판을 깨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교착된 북핵협상 국면에 새로운 물꼬를 트려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대북식량지원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중단된 북미 핵협상과 남북 접촉이 재개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올해 북한은 10년만에 최악의 식량난에 직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빠르게 상당한 규모로 식량지원이 이뤄질 경우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대미, 대남 압박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한 것으로 은근히 내세울 수 있게 된다. 대미 북핵협상,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셈이다.

이처럼 머지않아 북핵 협상과 남북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문제는 협상이 재개될 경우 진전을 이룰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북미 핵협상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쟁점은 미국의 '선 비핵화-후 제재 해제'와 북한의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비핵화' 입장이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과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둘러싼 확신이 미국도 북한도 없다는 점이 작용하고 있다.

북한이 과연 30년 이상 막대한 투자를 해 성공시킨 핵무장을 한 순간에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이를 믿지 못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 정부가 '선 비핵화-후 제재해제'를 내세우는 것은 지금까지 미국이 북한과 협상하면서 중간 단계에서 보상을 하는 협상이 모두 실패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1994년의 제네바 핵협의, 2005년 '9.19 공동성명' 등 모든 합의가 결국 무산됐는데 이 모든 과정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지금 북한을 상대로 '불가능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걸핏하면 북한의 경제적 가능성이 엄청나다면서 비핵화만 하면 대북 제재가 풀리는 것은 물론 대규모 대북투자가 이뤄질 것이고 북한은 경제적으로 비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핵협상이 타결됨으로써 경제 발전 여건이 개선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그 과정에서 체제 붕괴 위험까지 감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따라서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비핵화'를 내세우는 것은 체재 붕괴의 위험이 없는 단계까지만 비핵화를 진전시키는 것을 통해 북한에 대한 제재를 풀고 최대한 보상을 받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결국 현재로선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그다지 강력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이런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 비핵화 과정이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 비핵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북미간에 신뢰가 쌓이면 궁극적으로 완전한 비핵화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기대감을 갖고 이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논리적으로 볼 때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지 못하면서 북한과 비핵화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협상'을 하는 꼴이다. 그러나 미 정부의 입장은 협상을 통해 상황 악화를 방지하는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테스트하고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북한은 비핵화가 마무리된 뒤에도 '인권 침해가 심한 북한의 특수한 체제'를 미국과 국제사회, 남한이 용인할 수 있느냐고 의심하고 있다.

따라서 협상 과정에서 북미 양국은 이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불신을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이 문제가 협상에서 최종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단계적인 비핵화 과정에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고 상대에 대한 불신이 해소되는 과정, 즉 불가피하게 장기적일 수밖에 없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북한과 핵합의가 북한이 보상만 챙기고 비핵화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미국의 판단이 이런 방식을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다. 결국 미국이 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려면 '선비핵화-후제재해제'의 주장을 접고 단계적 비핵화에 대한 보상의 수준을 줄이는 방식으로 타협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연말까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계산법'으로 나오라고 시한을 정해 통보했었다. 이는 미국이 제재를 유지하면 결국 북한이 굴복할 것이라고 오판하지 말고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입장을 바꾸라는 압박성 발언이다.

대북 식량지원 등을 통해 북핵협상이 재개된다면 미국과 북한 모두 지금까지 보다는 훨씬 더 진솔하게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yjkang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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