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동묘지 쓸쓸히 잠든 무국적 조선인 213위
"돈 벌어보자"고 미국 왔는데…노예 노동에 고통
"잃어버린 나라 구하자" 독립운동 자금 지원 앞장
일당 5센트 돈 모아서 상해임시정부에 자금 지원
[편집자주]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벌판. 이곳엔 213명의 한인이 작은 콘크리트 무덤에 잠들어 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이 무덤의 주인공은 1903년 하와이행 증기선 갤릭호에 탄 한인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노예노동을 견뎌가며 번 일당 5센트에서 큰 몫을 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놨다. 그 돈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들은 독립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뉴시스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기록된 이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어땠을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조명했다.
【캘리포니아=뉴시스】김태겸 박종우 기자 =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중심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다섯 시간을 달리면 조선인 155명을 만날 수 있다. 포도농장과 밀밭,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을 지나 도착한 리들리 공동묘지에서다.
그들을 찾은 날은 지난해 8월, 공동묘지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KIM', 'LEE', 'PARK'. 빛 바랜 콘크리트 비석을 바짝 들여다 봐야 보이는 반 쪽 짜리 이름만 이 무덤의 주인이 조선인임을 짐작하게 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이미 낡아버린 조화가 전부다. 삶만큼 죽음도 외로운 이들의 묘지는 중가주(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 사이 지역) 한인역사연구회의 차만재 회장이 관리한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12km 떨어진 다뉴바 공동묘지에도 조선인 58명이 고된 삶을 마치고 잠들어 있다.
차 회장은 "리들리와 다뉴바에 213명의 조선인이 묻혀 있다"고 했다.
차 회장에 따르면 그 중 가장 장수한 사람은 강화중 선생이다. 강 선생의 아들인 윌리 강은 작고 전 차 회장과 만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 집에 저녁을 먹으러 와서 아버지(강 선생)에게 현금으로 300~400달러를 내놓는 한인 이주 노동자들이 많았어요. 평생을 타지에서 일했는데 일흔이 넘도록 고작 그만큼 돈을 모은게 전부인 사람들이었지. 죽으면 묻는 데 써 달라고 이름을 적어놓고 가서, 아버지가 자주 눈물을 훔치셨죠."
이들은 대부분 구한말 극심한 가뭄과 식량난을 피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러 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1903년 증기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해 미국 본토로 흘러 들어가 중가주(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 사이 지역)의 노동자로 정착했다.
삶의 목적을 잃은 당시 한인 노동자들은 미국을 찾아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봤다.
12시간 동안 이어진 고달픈 노동의 대가인 일당 5센트 가운데 상당액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은 이유다.
미주국민회 자료집에 따르면 당시 리들리·다뉴바 한인들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특별모금을 진행해 13만8350달러를 상해로 보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운영자금의 약 60%를 조달하며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후손도 없이 쓸쓸한 생을 마쳐야 했다. 100년이 지난 2019년에도 그들의 무덤에는 쓸쓸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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