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그림은 없었다...갱년기 작가의 웃픈 '면벽수행'

기사등록 2019/04/09 15:40:22 최종수정 2019/04/09 17:16:12

꽃무늬 스트라이프 벽지를 그림으로...정소연 개인전

이화익갤러리 올 첫 전시 10부터 30일까지 개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9일 오전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정소연 작가가 벽지를 입체회화로 선보인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것은 벽지인가, 그림인가.'

전시장은 소녀방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전한다. 꽃무늬와 둥근 액자, 파스텔톤 색감때문이다.

"벽지를 그렸으니 벽지그림이죠."

화려한 스카프를 맨 작가가 "정말 '벽지 그림'"이라며 아나운서처럼 똑부러지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9일 오전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만난 정소연(52)작가는 3년전과 변함없는 모습이었지만 작품만은 확 바뀐 분위기다.

3년만에 다시 연 개인전 타이틀은 '면벽수행'.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갱년기가 찾아왔다. 육체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더라. 체력이 딸리고 우울했다."

날마다 "하염없이 벽을 보고 앉아있는데, 또 병이 도졌다. "벽을 보고 있자니... 웬만한 그림보다 벽지가 낫더라. 벽지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벽을 보고 있다가 그린 그림, 말 그대로 벽지화'다."

【서울=뉴시스】정소연, 벽지그림 Wallpaper Painting 2, Oil on canvas, 60x50cm, 2017

여성 작가의 피할수 없는 운명이다.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심경의 변화를 밝힌 작가는 "3살때부터 그림을 시작해 50년동안 해서인지 쉬고 싶어도 쉬어지지가 않더라"면서 "모든게 허무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는데, 벽지를 보니 또 그리고 싶어 그린 아주 슬픈이야기"라며 활짝 웃었다.

정소연 작가는 예중 예고때부터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공과대학 Communication Arts 석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공학과 예술공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나이쯤 되면 작품을 즐겁게만 할줄 알았어요. 벽지에 빠지니까 아이디어가 떠올라 온갖 벽지를 구입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집에 있는 벽지는 단색이어서, 해외 유명 벽지를 몇 롤씩 사모았어요."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전부 다 벽지를 보고 그렸다. 그래서 그림 제목도 '벽지 그림'이다."

스트라이프 패턴은 하드엣지 추상이 아니라, 실제 스트라이프 벽지를 그린 것이고, 금테 두른 둥근 액자에 담긴 꽃 그림은 꽃을 그린게 아니라 꽃벽지를 그린 것이다.

또 인테리어 모형도처럼 내부 외부공간을 흐리고 결합시켜서 일상의 공간을 확장시킨 작업까지 다양하다. "50년 동안 해왔는데, 또 그린거죠...할 줄 아는게 이것 밖에 없어서 이렇게 됐어요. 호호호"

정소연 작가는 '주입된 이미지'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의 착각을 깨우쳐 왔다. 식물도감에 있는 그림을 그렸지만, 사람들은 모두 꽃그림 풀그림이라고 했고, 안압지등 건축 모형을 보고 그렸는데도 안압지로 인식했다.  그 동안 홀마크 카드(The Hallmark Project, 2011), 각종 도감(Neverland, 2014), 건축 모형(어떤 풍경, 2016)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실재와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서울=뉴시스】정소연, 벽지그림 Wallpaper Painting 22, Acrylic on canvas, 100x180cm, 2018

이번 전시도 '실재와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벽지는 원래 벽화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다시 벽지가 그림이 되었다." 작가는 "실제에서 이미지가 나오는게 아니라 이미지가 실제를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철학자 빌렘 플루셔(Vilém Flusser)의 말을 철떡같이 믿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 같은 이야기다. 
 
벽지를 그린 '벽지 그림'이지만 화가가 만들어낸 그림은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벽지를 보고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실제적인 것에서 시간을 삭제하고 공간에서 깊이를 삭제하고 평면화한 추상게임이다."

실제 추상화같은 벽지그림은 공간에서 깊이를 없앤 평면 추상화인 셈. 작가가 말하는 원본과 모조, 공간과 평면 사실적인 표현과 추상성이 겹쳐있다.

벽지 그림은 '단색화 열풍'의 반항심도 한몫했다. 작업실에는 빈 액자가 많았다. 단색의 벽에 액자만 두르면 단색화가 되는데... 그동안 수많은 색과, 레이어를 쌓으며 작업해온 자괴감이 깊어졌다. 하얀 벽, 그렇게 단색화 같은 벽지를 바라보다가 시작한 작업으로 단색이 아닌, 색이 많은 다색화 그림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벽지를 많이 사봤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 전시장 벽을 도배하려고도 했어요. 이화익 대표가 원상복귀해야 한다고 해서 화학제품도 샀죠. 그런데 갱년기라 또 그런일 하면 어깨도 아플 것 같아 포기했어요.하하하~" 

대신 이번 전시에는 나무판에 진짜 벽지처럼 만든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그랬더니 오브제가 되고, 입체조형물이 되고 연극적인 조형요소가 추가돼서 벽에다 붙인 것보다 재미있는 게임이 된 것 같아요." 결국 삶은 예술이다. 전시는 30일까지.

【서울=뉴시스】정소연, 벽지그림 Wallpaper Painting 26, Oil on canvas, 나무액자, 벽지, 우드스테인, 집성목, 200x12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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