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의 시간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한 박일환의 시집이다.
'그녀의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 거짓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늘씬한 여자를 좋아하거나/ 애교 넘치는 여자를 좋아하거나/ 지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지만/ 남자들은 천성이 바람둥이라서/ 그리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 그러니, 당신에게 반했어요/ 라고 말하는 남자들은/ 더 늘씬하고, 더 애교 넘치고, 더 지적인 여자를 만나면/ 태연하게 똑같은 말을 늘어놓을 것이다'('슬픈 현대사' 중)
'미황사 배롱나무 아래서 비를 그었다/ 긋지 않아도 될 만큼 살살 뿌렸지만/ 굳이 배롱나무 아래서 그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나 대신 빗방울을 영접했다/ 미황사가 고맙고 배롱나무가 고마웠다// 내려주신 비가 고마웠다는 얘기는 덤이다'('덤' 전문)
박 시인은 "시를 쓰면서 늘 생각하는 비유란 결국 결합이다"고 한다.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를 접붙여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그런 게 시의 기초라고 배웠다. 길을 가다 음식점 간판에 붙은 '포장 판매' 네 글자를 만났다. 포장과 판매의 결합 거기서 새로운 의미, 예전에 없던 상품이 탄생했다. 당신에게 가는 이 시집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계속 시를 쓴다면 결합이 아니라 분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동안 너무 많이 붙어먹었다는 것부터 고백해야 한다고." 184쪽, 9000원, 반걸음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한 박소란의 시집이다. 우리 주변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이는 곧 시인 자신의 슬픔이기도 하다. 체념이 더 익숙해진 삶의 불행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저 작고 무른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르나 어떻게/ 사랑하나// 저 알 수 없는 것을/ 자꾸만 꼬물꼬물 숨 쉬는 것을// 부둥켜안고 어디로 달려가나/ 순백의 울음소리가 병원 복도를 번쩍이며 스칠 때/ 더운 가슴팍을 할퀼 때// 사람들은 아프고/ 잇따라 울고// 또 어떻게 웃을 수 있나'('아기' 중)
'걷어차면 소리가 난다/ 울음보다 웃음에 가까운// 소리는 그럴듯하다 어디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표정// 지금껏 궁리해왔다 아주 사소한 무언가를('깡통' 중)
박 시인은 "'아름답다'를 대신할 말이 없었다"며 "''울음'이나 '웃음'과 같이 '나'는 지우려 해도 자꾸만 되살아났다"고 한다.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한 사이 거듭 '문'을 열었고 그 사실을 끝내 들키고 싶었다. 문을 열면, 닫힌 문을 열면 거기 누군가 '있다'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한다." 168쪽, 9000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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