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10년만에 3년 임기 채운 첫 관장 기록
'미술계 히딩크'로 주목...세계속 한국미술 국제화 시동
'문명'사진전 해외 첫 수출·마르셀 뒤샹전 국내 첫 유치
임기 만료 13일까지 근무...짧은 임기 공론화 숙제 남겨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21세기형 신인류 노마드족(Nomad). 스페인에서 온 남자 이야기다.
1966년 스페인 이비사 섬에서 태어났다.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섬에서 아버지는 트럭기사로 일했다. 한때 관광지에서 히피들이 몰려 살았던 지역으로 그는 농촌과 히피, 두 세계 사이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1930년대부터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 예술가 볼프강 슐츠, 라울 하우스만, 윌 파버 등 유명인이 방문할 정도로 독일 프랑스 관광객이 많았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에 모두 떠나버렸고 섬은 히피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1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는 여름철 가장 인기 있는 클럽 지역으로 부상했다. 나이트클럽 열기가 여전히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비사섬은 지금도 신나는 음악과 365일 파티가 열리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어린시절 프랑코 독재 경험과 민주화 과정을 거쳤고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갔다. 바르셀로나대학에서 철학·교육학을 전공했다. 스무세살때부터 노마드가 시작됐다. 그를 계속 이동시킨 건 미술이다. 처음 간 곳은 브뤼셀. 1989년 벨기에 브뤼셀 현대건축박물관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비테 드 빗 현대미술센터 예술감독, 베니스비엔날레 스페인관 큐레이터로 지냈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년간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철학·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어린시절 드나들었던 미술관 덕분이다.
고향 이비사 섬에는 1969년 건축된 스페인 제2의 현대미술관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987년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미술에 빠져들었고 업으로 삼게 됐다. "당시 나에겐 예술이 로큰롤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유럽권에서만 이동하던 그가 지구 한바퀴를 돌았다.
"안냥하십니까. 저는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2015년 12월 14일, 서울에 등장한 그의 첫 인사였다. 한국말이었다. 파격과 충격을 몰고온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내 첫 외국인 관장 입성이었다. 그가 오기전 미술관은 1년 2개월간 표류상태였다. 전임 관장은 학예사 부당 채용으로 직위해제됐고 미술관은 학연과 지연 수렁속에 빠져있었다. 유럽에서도 '외국인 관장'이었던 그는 한국 첫 '외국인 관장'이라는 부담감은 크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미션을 줬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들어라'
3년이 흘렀다. '미술계 히딩크'로 화제였지만 기대와 기대사이 실망도 컸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했던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명언처럼 그도 말을 남겼다. "나는 더 일하고 싶다"
"미술관장의 3년 임기는 짧다. 제가 한국에서 뗀 첫 발걸음이 두 번째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좌절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1일 '연임 불가' 통보를 했다. 이후 다시 미술관장 공모가 진행됐고 16명이 응모, 12월 현재 3명(김홍희 이용우 윤범모) 후보로 압축된 상태다.
많은 매체들이 '떠나는 마리 관장'을 타이틀로한 인터뷰를 쏟아냈다. 벌써 한국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리 관장은 여전히 근무중이다.
"이미 할 말은 다했고 떠나는 마당에 더 할말이 없다"는 그와 지난 6일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겸재 정선 그림같은 인왕산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관 집무실. 외국인 관장이 앉아있는게 이젠 자연스럽다. 책꽂이에는 전시 도록이 이전보다 많이 들어찼다.
오는 20일 언론에 공개후 22일 개막하는 마르셀 뒤샹(1887~1968)도록이 벌써 꽂혀있다. 개막일에도 나와지 못해 눈총받았던 그간 전시 도록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그러니까. 3년 걸렸다." 그가 말했다. "일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과를 내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게 있다"고 했다.
"앞으로 미술관은 긍정적인 성과를 낼수 있고, 더 큰 훌륭한 전시로 보여질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만 본다면 과천관에서 연 사진 문명전,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의 대규모 전시가 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술관 직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가 이미 긍정적인 성과로 보여지고 있다."
"물론 언어부문이 개선돼야 하는게 먼저 보이겠지만 관장이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점을 잘 해왔나 강조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며 전시 이야기로 이어졌다.
큐레이터 출신 마리 관장은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은 '마리표 전시'가 열매맺은 결과다. 2016년 여름부터 추진했다. 지난해 봄 개막예정인 앤디워홀전과 추진중인 피카소전이 자금 문제로 엎어지면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했다. 기대가 실망이 될때 비난이 쏟아진다. 예산과 내부 구조적인 문제가 컸지만 시행착오는 교훈을 선사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굵직한 전시를 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 작가를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요한 세계 유명 미술거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마르셀 뒤샹은 현재의 현대미술의 모습이 된 토대가 된 인물로 20세기 개념미술 선구자다. 뒤샹은 미술의 창조와 해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뒤샹 사후 5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 첫 전시이자 아시아태평양지역 역대 최대 전시다.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 150여점이 들어온다. 대표작인 '샘'과 뒤샹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가 디지털로 구현된다.
"뒤샹의 가장 훌륭한 컬력션을 모아놓은 전시이기 때문에 어느 전시보다 중요도가 특별히 높다." 이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마리 관장의 네트워크 힘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과는 20년이상 가깝게 지내온 기관이다. 그래서 순회전이 일본에서 개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으로 가져오게 됐다. 이동 경로에 있어서 자금적인 메리트가 있겠다 생각했고 제안했고 성사됐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대형 전시를 기획해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추진된 만큼 운송료와 보험료도 절반으로 줄였다. 같은 지역의 기관과 파트너쉽을 맺고 외부 기업으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향후에도 해외순회전을 같이 주최하고 끌어오는 협업하는 기관이 늘어난다면 미술계 중심이 미국 유럽쪽이 아닌 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크다"는게 그의 전망이다.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명전' 예를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사진재단과 기획한 대규모 사진전으로 국내 전시이후 해외 순회전을 한다. 중국 베이징 올렌스 현대미술센터(2019년),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20년), 프랑스 마르세유 국립문명박물관(2021년) 등 10여개 유명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우리 미술관이 시작의 발을 떼고 주최하고 수출하는 전시다. 이런 점에서 전시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밖으로 내보내는 전시 수출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또 수준 높은 도록도 해외 서점에 유통할수 있게 됐다. 그래도 3년 걸렸다"
마리관장이 스위스 출신의 사진 전문 기획자 윌리엄 유잉(전 로잔 엘리제 사진미술관장)과 “10년 전부터 구상한 전시"로 사진을 통해 인류 문명을 해석한 전시는 호평을 얻고 있다. 또 현재 전시중인 단색화 거장 윤형근 전시도 이탈리아 순회전을 추진중이다.
이쯤되면 그에게 주어진 '세계속의 한국 미술관' 미션은 절반의 성공이다.
3년간 그는 매 전시때마다 나와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어 "아름답고 훌륭한 전시다. 많이 홍보해 달라"는 주문까지 할 정도로 문장이 늘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해 "한국어도 금방 배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언어장벽은 높았다. '마리 관장은 말이 안통해 안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마리 관장은 "한국어 발음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한국어가 복잡한 면도 있지만 한국어를 익히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따로 있다"며 한국어를 많이 배우지 못한게 큰 아쉬움이라고 했다.
"3년 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모든 관심과 정신이 미술관에 쏠려야 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다. 사실 이 나이에 새로운 언어에 습득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걸 쏟을수 있을만큼의 여분의 시간이 많지 않았다.나의 모든 뉴런 세포가 미술관에만 집중했다. 하하"
한국에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월요일 출근했다 정신차리고 나면 금요일 저녁이고, 토요일에 힘들었다 쉬다가 일요일 보내면 월요일 아침이 지났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면 금요일에 와있고 한국에서는 다른곳에서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미술관 세계회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실제로 외국인 관장이 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시동을 걸었다. 외국 작가 참여 전시가 늘고 세계 미술계 유명 큐레이터들이 집결했다. '슈퍼휴머니티’,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 같은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지적 담론을 생산하는 기관이자 현대미술과 문화에 대한 이슈를 토론하는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수용에서 수출용으로 미술관의 변화는 '외국인 관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빨리빨리' 성과 분위기속에서 조기 사임설 위기도 있었다. 한국미술 국제화와 관련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때마다 마리 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에 힘썼고, 이를 기반으로 훌륭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언론사에 2번(2017~2018년 전시 라인업에 대한 해명과,연임불가 통보받았다는)이나 공개 편지를 보내는등 소통 강화에도 적극적이었다.
미술관에서 40여개나 열렸던 전시를 줄였다. "퀄리티를 높이고 학예사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을 줘야한다"는 취지로 학예직의 전문역량을 강화하고 전시를 보다 내실화했다. 마리 관장 취임후 2016년 29개, 2017년 27개, 2018년 25개 전시를 기획 추진, 새로운 해외 전시들이 잇따랐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신여성 도착하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리처드 해밀턴', '역사를 몸으로 쓰다', '아크람 자타리', '문명: 우리가 사는 방법'전에서 '마르셀 뒤샹'전등까지 이어진다. 관람객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2015년 208만명에서 2016년 221만명, 284만명(2017)을 돌파했다.
해외 전시만 많이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그런 의견을 들을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미술을 해외미술계와 단절시킨다는 의미일까?”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지만 모든 기관들이 해외 전시를 보여주면 지역내에는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역내 미술계에 속해있거나 소외받았다고 느끼는 경우다.
그는 단호했다."그런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한국사회는 해외미술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또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라면서 "해외미술계와 연관성이 떨어지고 고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방향은 아니다"라고 잘랐다.
그래서 미술관장직 3년은 짧다는 주장이다. 소장품의 질적 개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3년에 한 번씩 기관장을 교체하면 일관된 수집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공공미술관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장품 규모를 키워가야 하는 동시에 분명한 가이드라인과 목적이 수반되어야 한다"며 "또한 소장품의 수로 미술관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성과를 평가하기에 3년은 정말 너무 짧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니콜라스 세로타 관장이 27년 재임했다. 미술관은 장거리 마라톤 주자이지 단거리 스프린터가 아니다." 결정권과 재량권을 가진 히딩크와 달리 미술관 규정에 갇혀 제약을 받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축구는 경기 하나하나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지만 미술관은 장기 기획과 연구, 안정성과 연속성이 중요하다. 후임 관장에게는 목표를 성공시킬 수 있는 시간과 도구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지난 3년은 제 커리어에 있어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였다. 매우 소중하고 활기찬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유럽인들은 교과과정에서 아시아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로운 발견과 끊임없는 배움이 잇따랐던 3년이었다."
"3년동안 매우 행복했다"며 미술관 직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국립미술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미술관에 처음 일을 시작해서 모든 직원들을 만나고 3개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3년간 함께 진행했던 모든 전시가 매우 보람 있었다. 가끔 나의 요청이 쉽지 않았을텐데 현실화시켜준 노력에 대해 감사드린다. 제가 직원들을 통해 많이 배웠던 것 만큼 직원들도 나를 통해서 뭔가를 배웠길 바란다. 더불어 어떤 순간, 관계에 있어서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니 만큼 이해해 달라. 결과가 항상 중요하다고 말한 만큼 그 부문을 크게 봐달라"
그러면서 "후임 관장이 와서 우리가 함께 이뤄놓은 베이스를 끝까지 잘 즐길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남겼다.
연임은 불발됐지만 마리관장은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관장으로 기록된다. 지난 10여년간 개방형 직위제 이후 임명된 국립현대미술관장들은 부침이 심했다. 불명예 퇴진이 잇따랐다. 2003년 임명된 김윤수 전 관장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1년 남겨 두고 2008년 해임됐고 대우전자 CEO 출신 배순훈 전 관장(2009~2011년)은 임기 4개월을 앞두고 자진 사퇴했다. 정형민 전 관장(2012~2014년)은 임기를 마치고 서울관 개관 작업을 위해 1년 연장된 상태에서 직위해제됐다.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반백년이 흘렀다. 과천관 덕수궁관 서울관에 이어 청주관이 개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년 예산은 724억원, 학예인력 135명의 거대 미술관이다. 아시아의 원로 격인 근현대미술관이자 아시에서도 규모가 큰 미술관으로 꼽힌다. 덩치는 커졌지만 조직구조는 80년대에 머무르고 있다. 미술계는 현대미술을 홀대한다는 입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이 차관급인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은 국장급이다. '임기제 고위공무원 나급’으로 미술관에 파견나온 문체부 기획단장과 같은 급수다. 연봉은 각종 수당을 합쳐야 1억원 안팎이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미술계 히딩크'로 불릴수 없는 구조다.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 축구 감독으로 10억원 안팎을 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위상과 권한, 임기 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와 홍대 파벌 구원투수로 왔던 그는 이제 다시 '미스터 션샤인(이방인)'으로 떠난다.
임기 만료일은 오는 13일. 이미 글로벌 헤드헌팅 업체에서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장직 러브콜을 해오는 상태지만 모두 미뤄뒀다. 한국을 떠난 이후에 진지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미술관 업무를 정리하는 것과 향후를 대비하는 것을 같이 진행할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쉬움속 미련을 털어서일까. 애정이 넘친다고 하자 "계약직이니 업무에 충실한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자신이 추진한 마르셀 뒤샹전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는 "개막은 못보고 가지만, 내년 2월 한국에 방문해 꼭 관람할 것"이라고 했다. 오는 17일 취업비자 만료로 부인과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를 탄다.
첫 외국인 관장으로 한국 미술계에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킨 그는 "한국을 떠난 다음 목적지는 버케이션(vacation)"이라며 눈을 찡긋했다.
"한국 예술은 매우 우수하고 흥미롭습니다. 한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기를 바랍니다. 감싸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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