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서 개인전...15일부터 12월23일까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웬 이불?...' 그림처럼 보이는 이불 앞에서 멈칫하고 있을때였다.
"이게 무슨 속담으로 보여요?"
독특한 인상의 작가가 화려한 누빔 이불 앞에서 질문을 던졌다.(짧은 커트머리에 알록달록 원피스를 입고 빨간 스니커즈에 회색빛 스타킹을 신었다. 안경너머에는 핑크+초록색을 칠한 눈화장이 눈길을 끈다.)
벽에 걸린 이불앞에서 동상처럼 생각이 굳어지고 있을때 그가 한방 더 먹였다. "다섯살짜리 조카는 2개나 맞췄는데..."
난망함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순간 작가가 말했다.
"'불난집에 부채질한다'에요."
그야말로 '헐~'이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이불이다. 흰 바탕에 빨강 파랑 초록 주황이 기하학적으로 어우러져 '고상한 추상화'로 인식한 생각의 틀을 깬다. '속담으로 만든 이불' 작품이라는 건 '제목'이 알려준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이슬기(46)작가다. 말을 할수록 세상 엉뚱함이 폭발하는 작가인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뛰어나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 펼친 개인전은 '다색화의 향연'이다. 그냥 보면 전통오방색을 쓴 '색면 추상화'로 보이지만 반전있다. 누빔 이불을 벽에 걸거나 바닥에 펼친 셈인데 '있어빌리티'(있어 보이게 만드는 능력)기술이 탁월하다. (물론 전시장에 있는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제목만 붙이면 현대미술이 되는 세상속에서 '이불 전시'가 새삼 특이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만든 작업이 모두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상업성과 예술성에 눈 뜬 화랑주의 안목이 재능과 기능을 부활시킨다.
'누빔 이불'은 작가가 2014년부터 통영 누비장인과 진행해온 '이불 프로젝트:U'다.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누비이불을 선물 받았어요. 아무 생각없이 잘 쓰다가 ‘다른 프랑스 친구들한테 선물로 사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방문할 때마다 이불을 사러 갔었는데, 지금은 더이상 안 만든다고 하더라구요. "
그래서 이불을 직접 만들게 됐다. "아예 누빔방향까지 고려를 해서 말이죠. 새로 만든 옛날 이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색깔의 근원을 찾다가 오방색을 접했고, 이불 문양으로는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속담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여 반영했어요. 그 이불을 덮고 자면 그 이불이 사용하는 이의 꿈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2002년 한국-프랑스 교류 전시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돼 한국에서 전시한 후 전통 소재와 문양, 빛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있다.
곱고 예쁜 색으로 치장한 이불 작품은 그야말로 한땀 한땀 장인정신이 배어있다. '불난집에 부채질한다'를 비롯해 '엎질러진 물', '싹이 노랗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등 우리 전통 속담을 작가의 아이디어로 스케치해 장인들에 전달하면 통영 누비장인이 진주명주에 바느질 해 만든다. 화려한 색에 취해 다가가면 색과 색 문양과 문양을 맞춘 선들이 반듯하고 질서있게 뽐을 낸다.
따지고 보면 장인이 만든 누빔 이불인데, 작가가 속담을 불어넣자 예술작품으로 둔갑했다. 완벽한 화음을 고조시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작가가 감독한 결과다. "장인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이 선과 선을 맞추느랴고요." 작가가 가리키는 선을 보니 선들은 규칙적으로 어긋나있거나, 결을 달리한다. 이야기의 흐름을 전하기 때문이다. 특유의 해학적인 시선, 기하학적 패턴과 색의 힘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원초적으로 되돌려 놓는다. 손 안대고 코 푼격이지만, 아이디어가 우선인 세상이다. 그렇게 보면 장인과 협업한 누빔이불은 완벽한 추상화이자 개념미술로도 장르를 탈주한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난생 처음 작업한 '나무 체 프로젝트 O'도 소개한다. 프랑스 중부 지역 나무 체 장인과 협업한 작품으로 친환경 공공미술 가능성을 제시한다.
조명과 함께 어울린 '나무 체' 작품은 2m 높이에 설치하여 위로 올려다보게 한다. 가로 88cm 원형 형태로 30년된 너도밤나무로 제작했다. '나무 체 프로젝트 O'는 '아재 개그'처럼 만들어졌다. 작품 제목 오(O)는 하늘을 뜻하는 'Au Ciel'에서 'au'와 동일한 발음에서 시작됐다. '색깔의 무게를 재다'는 뜻을 담았는데 곡물 계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쌀의 양을 재는 단위인 ‘되’가 사각의 형태로 측량된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보아소 (boisseau)’라는 원형 나무통으로 곡물을 측량한 것에 착안했다.
"그 원형 모양과 나무 체 모양을 접목시키고, 원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조각을 구성했어요. 무게를 재는 기구는 보통 아래에 위치시키는데, 저는 머리 위에 위치시켜 기능이 있을법한 ‘보아소’를 연상시키는 조각으로 변형한 것입니다."
작가는 원의 안쪽의 틀을 나눈 뒤, 틀의 안쪽 만을 오방색으로 채색했다. (작가는 회화 작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수 있게 한 작품은 한글 ‘여,우,아,이,요’ 등의 모음을 연상시키는 문양이 들어있다. 작가의 엉뚱한 재치를 엿볼 수 있다.
"배가 고파도 예술가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는 작가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은 전시장에도 구현됐다. 갤러리현대 1층에 들어서면 노란 은행잎이 깔려있다. 일명 '은행잎 프로젝트 B'로 가로 6m, 세로 12m 규모의 전시장 바닥을 은행잎으로 가득 채워, 밟을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낙엽밟는 소리도 들려준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으로 은행잎의 의미,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은행잎을 보면 하나인데 둘이죠. 동서양이 합쳐있다는 말도 있어요. 또 괴테가 그랬어요. 은행잎은 하나였던 것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잎사귀 두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벽의 보라색과 대비되어 은행잎처럼 이중 인간이 되어봤으면 합니다. 전시장 색으로 늦가을에 갤러리에서 누리는 힐링 효과도 있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은행잎을 자세히 보면 결이 있다. 누빔이불의 세로줄과도 연결된다. 강박증같은 작가의 깨알 디테일로, 작가는 "관심있으면 모든게 다 연결된다"고 했다.
서울 출생의 이슬기 작가는 1992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수학했다. 4년전 갤러리 현대 도형태 대표가 파리에서 만나 기발하고 독특한 작가에 반해 전시를 추진했다. 멜버른의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2001년 대안공간 파리 프로젝트룸(Paris Project Room)을 설립하고 운영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명품업체 에르메스(Hermes)와 함께 리미티드 에디션 캐시미어 퀼트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진행했다. 또 가구전문 브랜드 이케아(IKEA)와 진행한 아트 러그 프로젝트에서 출시되는 러그는 2019년 봄에 한정 기간 동안 판매가 될 예정이다.
장인들과 누빔 이불을, 30년된 너도밤나무로 '나무체'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결국,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질문하게 하며 다가서게 하는 것 '미술의 힘'이기도 하다.)
"한 작업이 다른 작업을 불러 오는 것 같아요. 이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쓰는 물건들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더 나아가 생각해봤고, 인간이 제일 처음 사용했을 법한 것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바구니 프로젝트 W'가 나왔죠.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오래된 테라코타 그릇 표면에 있는 지푸라기 흔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인간이 처음으로 바구니 형태를 만들었고, 그 안에 흙을 빚어 넣어 그릇 모양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그렇게 바구니는 원시시대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형태도 변한 적 없이 쓰는 것입니다. 문화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르지만 공통된 점이 많습니다. '나무 체' 또한 그런 큰 둥근 모양을 이제는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기계가 사라지면서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장인의 노하우를 빌려 인간과 물건의 근본적인 관계를 제 방식으로 작업해 공동체의 공공 장소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제겐 무척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다마스스' 전시 제목도 튄다.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쉽게 알아 먹을 수 없는 현대미술의 묘미가 담겼다.
"다마스스 다마스스 다마스스 수리 수리 다마 다마 스스쓰윽 다마 수수 옥수수 다마스 다마스쿠스 수리수리마수리 아브라 카다브라... ‘다마스스’는 언어의 원초적 움직임을 확장시켜 제가 만든 주문입니다. ‘다마스스’라는 말을 퍼뜨려 우리만의 염원을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어요. 그럼 그 우리는 누구일까요. 저는 한 줄 한 줄을 이불에 박아 주시는 통영 누비 장인들을, 또 난쟁이 야자수의 말린 새순 이파리 하나 하나를 엮으시는 멕시코 바구니 장인들을 생각합니다. 흐흐흐흐흐허헝~앗, 한국에선 이렇게 웃지말라고 했는데...경박스럽다고...이히히히힝~" 전시는 12월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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