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훈민정음’(1446)에서 첫 번째 자음인 ‘ㄱ’을 “君字初發聲(군자초발성)” 또는 “君字初聲(군자초성)”, 혹은 더욱 줄인 “君(군: 해례 11, 12, 15, 19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집현전 8학사 중 핵심인물인 신숙주는 ‘동국정운’(1447) 서문에서 “以御製訓民正音定其音(임금이 지은 글인 ‘어제훈민정음’ 편에 따라 그 ‘음=초성’을 정하고)”라고 밝힌 후, 본문에서 ㄱ을 중국운서들에서 쓴 명칭인 ‘見(견)’이 아닌 ‘君(군)’이라 기재하였다.
지금 현대인들이 부르고 있는 ‘기역’은 조선 중종 때 통역관이었던 최세진이 그의 저서 ‘훈몽자회’(1527)에서 정한 ㄱ의 명칭이다. 그는 ‘其(기)’자의 초성과 ‘役(역)’자의 종성에 쓰임, 곧 “기자초성, 역자종성”을 줄여서 ‘其役(기역)’이라 하였다. 기역 또한 한자어인 것이다.
이처럼 “기자초성, 역자종성”의 준말인 ‘기역’이 ㄱ의 이름이므로, “군자초성”의 준말인 ‘군’이 세종대왕이 정한 ㄱ의 명칭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왜 지금의 학교에서는 ‘군’이 아닌 ‘기역’만을 가르칠까? 왜 우리는 세종대왕이 깊은 통찰 끝에 지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한마디로 훈민정음의 정통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연산군 이후 세종대왕의 정신을 계승하는 왕맥이 단절되고, 신성한 훈민정음의 왕국에서 ‘正(바를 정)’이 아닌 ‘歪(왜)’와 ‘俗(속)’을 중시하는 섭정들이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세진은 그러한 구분을 무시하고 ‘훈몽자회’에서 제 마음대로 ‘池末(디귿)’과 ‘異凝(이응)’의 이름을 지었다. ‘池’자를 현대한국인들은 ‘지’로 읽지만 구개음화 이전 최세진은 ‘디’로 기재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찬저이자 제2 훈민정음 프로젝트인 ‘동국정운’에서 ‘池’의 우리말 정음은 그 초성이 ㄸ을 쓴 ‘띠’이다. 그러니 최세진이 지은 ㄷ의 명칭 ‘池末’은 그릇된 것이다.
최세진의 ‘異凝(이응)’ 작명은 더욱 심각하다. 그나마 ‘其役(기역)’은 ‘기’의 초성과 ‘역’의 종성이 일치하고 ‘尼隱(니은)’도 ‘니’의 초성과 ‘은’의 종성이 일치하는 이름이지만 ‘異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異凝’은 ‘異자초성, 凝자종성’의 준말로, ‘異(다를 이)’자의 초성은 꼭지 없는 동그라미인 후음 ‘ㅇ’이지만, ‘凝(엉길 응)’자의 종성은 그도 훈몽자회에서 인정했듯이 꼭지 있는 동그라미인 아음 ‘ㆁ[ŋ]’으로 서로 짝이 맞지 않고 불일치한다. 이는 마치 하나는 나무젓가락을, 다른 하나는 쇠젓가락을 한 세트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다. 초성 ㆁ과 ㆆ 및 쌍자음을 없애버린 최세진의 행위는 훈민정음에 대한 왜곡이고, 창제자인 세종대왕에 대한 배신이며, 국문 교란 및 후대에 심대한 악영향 끼침인데, 우리는 언제까지 그를 섭정으로 모셔야 할까?
세종께서는 ‘훈민정음’ 책 중, 맨 앞 넉 장 분량의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총 23개에 달하는 우리말 자음들의 명칭을 7음(①아음, ②설음, ③순음, ④치음, ⑤후음, ⑥반설음, ⑦반치음)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다. 편의를 위해 각 이름자 뒤에 붙는 “字初發聲(자초발성)” 부분을 빼고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ㄱ君 ㄲ虯 ㅋ快 ㆁ業, ㄷ斗 ㄸ覃 ㅌ呑 ㄴ那,
ㅂ彆 ㅃ步 ㅍ漂 ㅁ彌, ㅈ即 ㅉ慈 ㅊ侵 ㅅ戌 ㅆ邪,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0년 11월 6일, 필자는 위 글자들을 무심코 바라보던 중에 불현듯 어금닛소리 ㄱㄲㅋㆁ의 명칭 君虯快業(군규쾌업)이 유의미한 사자성어를 이루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사진 3>에서와 같이, 아설순치후 5음 중에서 쌍자음이 둘 있는 치음을 제외하고 설음, 순음, 후음 모두가 넉 자 구조로 되어있었다. 요즘 말로 ‘심쿵’하는 감정이 일어났고, 첫 글자인 ‘君(ㄱ)’에서 마지막 반치음 ‘穰(ㅿ)’자까지 집중하여 살펴보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君(ㄱ)에서 穰(ㅿ)까지의 23개 글자는 그 전체가 세종대왕의 정신과 염원이 담긴 하나의 시문이었다. 세종께서는 “군왕의 으뜸 책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신조를 나타내고 가르치기 위해, 23개 자음 중 우두머리 글자(ㄱ) 명칭을 ‘君(임금 군)’으로 정하고 마지막 반치음(ㅿ)을 ‘穰(풍년들 양)’자로 정했다. 그런 후, 훈민정음 왕국의 백성들과 후손들이 대대로 쉽게 암송하고 따라 부를 자신의 시가를 다음과 같이 읊어나갔다. (옛글자 표기가 안되는 것은 현대음으로 적되, ㄲㄸㅃ 등 긴소리 쌍자음은 당시 표기대로 적음)
◆세종어제명칭시문 (해석: 박대종)
君虯快業(ㄱㄲㅋㆁ: 군뀨쾌업)은
군왕과 용왕이 기뻐하는 과업은
斗覃呑那(ㄷㄸㅌㄴ: 두땀탄나)니라.
두성의 밝은 빛이 미치고 에워싸 천하가 평안한 것이니라.
彆步漂彌(ㅂㅃㅍㅁ: 별뽀표미)한
활이 뒤틀리면 화살의 진행은 방향을 잃고 활시위는 느슨해지는
=근본이 틀어지면 나랏배는 표류하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即慈侵戌邪(ㅈㅉㅊㅅㅆ: 즉짜침술싸)하야
즉, 그로 인해 흉년이 들고 만사가 어그러질 것을 가엾이 여겨
挹虛洪欲(ㆆㅎㆅㅇ: 읍허홍욕)
허공의 큰물(은하수)을 두수로 떠서
閭穰(ㄹㅿ: 려양)이어라
마을마다(방방곡곡) 풍년 들게 하고 싶어라
위 23개 글자로 이루어진 어제명칭시문(御製名稱詩文)을 토씨와 함께 “기역, 니은, 디귿···” 외우듯 음만 암송하는데 10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위 초성 명칭들 중 일부는 동시에 11개 중성의 명칭이기도 하다.
유념할 사항은, 세종임금의 어제명칭시문에서 虯(뀨→규)는 ‘새끼용’이 아니라 ‘용’에서 나아가 君(임금 군)과 결부되어 비를 내려주는 ‘용왕’의 뜻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농자천하지대본야의 농업국가에서 적절한 비는 풍요의 필수조건이므로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뿌려주는 용왕을 표현키 위해선 ‘龍(용 룡)’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전체 문장의 의미와 음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라 ㄱ 다음의 ㄲ에 해당하는 용을 찾다보니 ‘虯(뀨)’자가 융통성 있게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명칭시문에서 覃(담)은 미치다(及), 呑(탄)은 에워싸다(并包), 那(나)는 평안하다(安), 彌(미)는 활시위를 늦추다(弛弓也)에서 ‘활시위가 늦추어지다’를, 그리고 “慈侵戌邪”에서 慈(짜→자)와 戌(술)은 어제서문의 ‘憫(불쌍히 여길 민)’자와 똑같이 모두 ‘가엾이 여기다’를 뜻한다. 侵(침)은 뒤쪽 穰(풍년들 양)자의 반대어로 쓰여 ‘흉년 들다’를, 邪(사)는 어그러지다(歪, 不正)의 뜻을 나타낸다. 挹(읍)은 ‘(물 따위를) 뜨다’, 欲(욕)은 ‘~하고자 하다’를 뜻한다.
ㄷ의 명칭인 ‘斗(두)’는 천상 28수 중 두수(斗宿), 곧 남두육성을 의미한다. 세종 때 간행된 천문학서인 ‘천문유초’에서는, 두성이 크게 밝으면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고 천하가 화평하다고 한 바, 이것이 바로 세종께서 ㄷ의 이름으로 ‘斗’를 삼은 까닭이리라. 국자 모양의 두수로써 허공 은하수의 큰물을 퍼내어 방방곡곡 풍년 들게 하고 싶다는 최고의 염원을 글자 명칭에 담으셨으니, 그 정신에 감동치 않을 수 없다.
결론하면, ‘훈민정음’ 앞 4장 분량의 어제훈민정음 편 중, “나랏말싸미…어엿비너겨…편안킈 하고져할 따라미니라”의 어제서문에는 세종대왕의 자주정신과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면, 이어지는 “君虯快業∘斗覃呑那。彆步漂彌∘即慈侵戌邪∘挹虛洪欲閭穰”의 어제명칭시문에는 애민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풍요의 부국(富國) 정신이 담겨 있다. 국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나라가 곧 부국이다. 이에 비해, 최세진이 지은 기역, 니은 등의 명칭들에는 혼과 의미가 없다. 훈민정음의 법칙을 무시, 왜곡하고 오직 편리성만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발견하고 그저 세종대왕의 위대한 가르침과 훌륭한 정신에 후손으로서 존경심과 함께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대종언어연구소 heobul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