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3년만에 신작 '푸른길'展
풍만한 여인상과 반인반수가 이어진 '행렬' 눈길
고고학 '실크로드를 달려온 서역인'책에서 영감
한반도 분단으로 끊어진 길 다시 이어지길 희망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약 3만년전에 제작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반갑다'고 할만한 조각이 대한민국에 있다.
테라코타로 여인상을 만드는 한애규(65)작품. 유방과 둔부가 과장된 '현대판 빌렌도르프 비너스' 같다.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빌렌도르프 비너스'처럼 초고도 비만이지만, 거부감없이 '여성성 미학'의 원천을 끄집어낸다.
80년대부터 억압된 여성의 해방과 함께 여성들이 상실해간 인간으로서의 자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결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을 만들어냈다. 풍만하게 과장된 우람한 여체를 통해 여성들을 흔들었다. 평생 다이어트가 숙명인 것처럼 사는 여성들의 숨통을 터주는가 하면, '여성 자신' 그대로의 의미를 말없이 깨닫게 하며, 그 품에 안겨 쉬고 싶은 충동을 준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감정을 전하는 건 '흙'의 힘이다. 작가가 세상의 비난에도 바꾸지 않은 재료다.
"흙은 촉감이 좋다. 젖은 흙은 차갑지만 정서적으로 따뜻한 재료다. 흙을 주무르고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작업실 창유리의 색조가 바뀌곤 한다. 또 흙은 냄새도 좋다. 마치 마른 땅에 소나기가 지나가고 난 후에 나는 풋풋한 흙냄새 같은 젖은 흙냄새가 작업실을 들어설 때마다 느껴져 마음마저 촉촉하게 만든다."
'구운 흙'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테라코타(Terra Cotta)는 점토를 원하는 형상대로 빚어 고온의 화력으로 구워내는 방식이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흙을 재료로 작업해 오고 있다. 손으로 흙을 주물러 만드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본능인 모성과 생명의 근원인 자연, 땅과 근원적이고 영원하며 한결같은 무엇이라는 동일함으로 존재한다.
반면 '테라코타'는 아직도 조각계에서 소외중이다. 작가는 "처음 테라코타 작업을 할때 (조각계)주변에서 왕따를 시켰고 오히려 방해를 했다"면서 "내 작업의 스승은 고고학과 유물들"이라고 했다.
조각은 돌과 브론즈라는 전통관념속에 테라코타는 유약도 없이 구워내는 쉬운 작품이라는 인식속에 조각의 위치에 함께 서있지 못하다. 작가는 197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1980년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후 1986년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풍만한 여인상이 테라코타로 나온게 된 건 함경북도 서포항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 '지모신'을 본 후였다. "가나아트에서 개인전 할 때였다. 역사서에 나온 지모신 조각들 형태를 보고, 이것 좀 키워서 만들어야겠다"고 한게 시작이었다.
고고학과 유물에 대한 관심은 '테라코타 여인'은 점점 작가와 동일시되고 있다. 조상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정처럼 보인다.
3년만에 신작전을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펼친 '푸른길' 전시에 그 마음을 담아냈다.
이번 전시 '푸른길'은 테라코타 조각을 통해 인류 문명의 교류가 진행되었던 길, 그 길 위에 존재했던 시간과 역사의 흔적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테라코타 조각에는 푸른색 유약 표현이 눈에 띄며, 다양한 종류의 흙과 소성온도의 조절로 고도의 농축된 조형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하 1층 전시공간에는 긴 행렬(17명)이 자리 잡고 있다. 행렬 속에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인 여인상을 비롯하여, 동물상,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등장한다. 여인상인 '조상'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조상이었던 여인을 상징하고, 말을 형상화한 '실크로드'와 '소'는 인류가 가축화시킨 친숙한 동물을 표현했다. '신화' 시리즈는 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부터 뒷부분은 말과 유사한 형태의 반인반수 조각이다.
지상 1층에는 기둥 조각과 파편들을 표현한 작품 '흔적들'이 있다. 이는 지나간 문명의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지만 찬란했던 한 시절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이 작품은 의자처럼 위에 앉아서 감상할 수 있어 전시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고, 자연스럽게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행렬을 이룬 조각상들에 대해 아트사이드갤러리 이정진 큐레이터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끊어진 북방으로의 길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작품 속 행렬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신화, 등과 같이 과거 북방으로의 열린 길을 통해 사람, 동물, 문화 등 인적, 물적 교류의 역사가 이어져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역사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기에 작가의 염원을 담은 '행렬' 작품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을 희망하고 있다.
작가는 "작업할때 남과북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고 생각했었다"면서 "1년 전과 판이 바뀐 세상에서 전시를 열자 시류를 타는 사람처럼 돼버렸다"며 궤면쩍다는 표정이다.
전시 준비를 위해 작품은 거의 2년전부터 제작됐다. 작가는 "그때는 박근혜 정권 서슬이 퍼랬던 때"라면서 "남북정상회담과 관계없이 시작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엉덩이가 풍만한 여인들이 반인반수와 함께 긴 행렬을 이끄는 작품은 "한반도로 오는 장면으로, 과거의 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7~8년전에 읽고 감명받았던 '실크로드를 달려온 서역인' 덕분이다.
"그 책에는 신라의 지배층이 터키 정도의 지역에서 왔다는 내용인데, 그런 것을 유물과 증거물을 수집해 역사적 사실들이 맞다고 써낸 책이다. 신라의 지배층이 이를테면 터키에서 정쟁에서 밀려난 프리기아인이라는 것. 알고 보면 우리나라는 아주 먼곳과 교역이 있었다. 그들이 왔었고, 우리가 갔었다. 중국과 한반도라고만 한정됐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고려시대까지 북방으로 교역이 빈번했었다는 걸을 알게 됐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통큰 생각이, 분단이 되면서 쪼잔해지고 지엽적인 것에 침잠되어 잇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혀있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고, 원래 넓은 지역을 오고갔던 우리의 정체성이 있으니까 이것은 반드시 뚫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행렬'을 제작했다"는 작가는 "통일까지는 모르겠다. 내 소관도 아니고, 기차나 다니게 해줬으면 좋겠다. 옛날 교역이 활발했던 것 처럼 막힘없이 뚫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고 했다.
한애규는 다독(多讀)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주경아독한다고 했다. 집과 작업실은 스무걸음 차이에 있다. 그런데도 늦을까봐 초조해하하며 시간을 엄수한다. 아침 9시면 출근, 6시에 칼퇴근해 자칭 '공무원 작가'라는 그는 8시 뉴스를 본 후 늦은 밤까지 책을 읽는다. 한달에 2권 정도 독파한다. 역사책을 즐기는데 책을 통해서 과거의 한 장면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통쾌하다고 했다. "이렇게 재미난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어요"
요즘에는 터키 소설가 요르한 파묵에 빠져있다. "그 사람의 글을 읽고 실망한 적이 없다. 그런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웬지 '사색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작품의 배경이다.
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40일이 걸린다. 성형에 20일, 보름은 말리고, 가마에 넣고 4일 정도 뗀다. 물론 하나만 하지 않고 동시에 2점 정도 같이 넣는다. 전시가 많지 않은 이유다.
"어느 화랑에서 기획전 하는데 한달 후에 신작 내주세요 하면 불가능하다고 할수 밖에 없죠. 두달 전에는 이야기해야 작품을 출품할수 있어요."
작품은 얼굴 표정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걸 하는 날은 심호흡을 해야돼요. 그냥 쓱쓱 그리는게 아니라. 표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날은 한번에 착착 그어지는데, 어느날은 수십번을 그어도 안돼죠. 그날은 게임 끝, 덮어놓고 나옵니다."
이번 작품은 더욱 신경을 썼다. 북방에서 오는 여인들이어서 이전 작품과 달리 눈이 커졌다. 또 처음으로 남자 조각도 1점 내놓았다. '서역인' 제목을 단 남성조각은 추상적으로 "처용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역사서를 참고했고, 서역인이 입은 옷은 '터키청 블루'를 써 '물 건너온 남자'로 포현했다.
높이 90cm, 여인상들은 곡면이 이전보다 강조됐다. 엉덩이와 형태를 더 둥글둥글하고 더 풍만하게 표현했다. 묵직함을 전하는 조각들은 몸통을 두드리면 '통통통'소리가 날 정도로 경쾌함도 있다. 속이 비어 있다. 형태를 비우지 않으면 못구운다. "항아리 만드는 기법처럼 만든다. 속이 두꺼우면 가마속에서 다 터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가슴과 엉덩이가 뽀족하게 변신한 여성상도 나와있다. 추상적으로 변한 최신작으로 둥글둥글한 여인상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짱짱한 긴장감을 전한다. 그래서 아직은 어색해 작품 제목이 '형태 연습'이라고 했다.
흙의 마력에 빠져 만들고 굽고를 반복해온 작가는 최근에야 작가가 되길 잘했다고 여겼다. "주변 친구들 지인들이 다들 은퇴하는데, 나는 은퇴 안 해도 되니..."라며 해맑게 웃었다.
작품은 작가와 흡사하다. 작가는 "우리 집안이 엉덩이가 크다"며 여인 조각상 제목을 '조상'으로 달았다"는 이유라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에 엉덩이 큰 여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할머니가 되고, 엄마가 되고, 내가 되고, 딸이 됐다고 하죠."
"다이어트요? 아유 저도 했죠.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포기가 돼더라고요 하하"
흙생흙사(핡에 살고 흙에 죽는)작가다. 손에서 주물러지는 흙의 감촉에 빠져 30년 넘게 흙에 미쳐있다. 그런데 그 흙이 요즘에 골탕을 먹인다. '테라코타 작가'의 애환이다.
"정말 흙(점토)이 문제에요. 온도와 습도등 테크닉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제일 문제가 흙입니다. 흙이 안받혀줘 힘들어요. 어떤 공장에서 어떤 흙을 사서 쓰는데, 그 흙 품질이 계속 유지가 안돼요. 공장이 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어떤때는 베트남 흙을 수입해서 섞어서 팔거든요. 이럴 때 작가가 제일 골탕먹죠. 한 가마를 다 버릴때가 있어요. 가능하면 국산으로 하려고 노력했는데 크게 당한 후에 미국 흙을 씁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이번 작품 '행렬' 맨앞의 여인상은 미국 흙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전시는 7월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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