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55) 극단 골목길 예술감독 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가 각색, 연출한 국립극단의 '페스트'는 한반도를 투영한다. 박 연출은 "'페스트'는 단지 질병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시대를 오염시키는 거대한 역병은 언제, 어디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분단 대한민국, 격변의 우리나라는 그 가능성이 더욱 크다 생각했습니다"는 얘기다.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페스트'는 원작의 해안 도시 오랑을 바람이 많이 부는 고립된 섬으로 탈바꿈시켰다. 역병 확산을 막기 위한 원작의 장벽은 남북을 나눈 휴전선을 은유한다.
명동예술극장에 설치된 방화벽을 작품 속 '장벽'으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박상봉 무대 디자이너의 의견은 장벽의 그로테스크함을 살리는 데 주효했다.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의 어슴푸레한 빛들은 거대한 장벽 앞 사람들의 절망적인 심정을 대변한다.
사실 박 연출 작품들에서는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고립 또는 장벽에 대한 은유가 엿보였다. 은퇴 후 고국이 아닌 말레이시아에서 삶을 꾸리는 일본인들을 그린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군대·전쟁·국가 등 거대담론 아래 가려졌던 외침을 무대 위로 호출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1940년대 만주에서 창씨 개명한 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주전선'이 그렇다.
박 연출은 "제가 분단의 땅,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면서 "그리고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갈라지게 됐는가를 생각해 봅니다"고 설명했다.
"우리에게 분단은 언제나 현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자주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작품을 다루는 방식이 있다기보다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카뮈가 원작에서 그린, 원인을 쉽게 찾기 힘든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과 절망은 연극에도 그대로 옮겨진다. 그 분위기는 특히 죄 없는 아이의 죽음에 대한 의사 '리유'의 절규에서 절정에 달한다.
박 연출은 "보이지 않는 질병의 회오리는 정신을 감염시키기도 합니다"라면서 "그래서 어려운 작업이지만, 시도하게 됐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품에는 희망이 뭉근하게 배어 있다. 이번 작품으로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대를 지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관객들에게 응원과 연대, 그리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 본래 의도였다.
박 연출은 5년 전 국립극단에서 올린 연극 '개구리'로 박근혜 정부에서 대표적인 연극계 블랙리스트가 됐다. 일반 시민이 함께한 촛불 정국을 거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위치에서 묵묵히 수행한 오랑의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감한 그는 우리 사회를 좀 더 긍정하게 됐다. 그런 부분이 '페스트'에도 묻어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도가 느린 부분도 있지만, 후퇴하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 차별 없이, 공평해지려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의 깊은 곳까지 톺아보는 '예민한 촉수'의 비결을 묻자 "보통의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고 겸손함을 드러냈다. "그 일상의 한 대목이 가끔 제 연극으로 무대에 오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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