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10여년 "이 바닥 제정신 아닌 사람 너무 많아"
"초보에 돈까지 급하면 먹잇감 되기 딱 좋은 상황"
조금씩, 조금씩 교묘하게 노출 유도하다 협박으로
모델들, 성추행 언제나 일정 수준 감수하면서 일해
"어떤 찍사는 내 발만 20분동안 찍더라…소름 끼쳐"
유출 사진 일일이 찾아 삭제…"경찰은 도움 안 돼"
A씨는 20대 초반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다. 피팅 모델은 물론 광고·사진 모델 등 다양한 분야에서 10여년 간 활동한 베테랑이다. 그는 유튜버 양예원(24)씨의 사진촬영회 폭로가 있기 약 열흘 전, 모델들 사이에서는 메시지가 돌았다고 했다. '아는 동생의 과거 사진촬영회 사진이 유출됐고, 당시 그 과정에서 강압 촬영과 성추행이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와달라고 했다. A씨가 메시지를 보고 처음 한 생각은 '또 당했구나'였다. "그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죠. 이참에 나쁜 놈들 싹 다 정리해야돼요."
A씨는 "비밀 사진촬영회 뿐만이 아니라 이 바닥에서 성추행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업계 관계자들부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까지 제정신 아닌 사람이 너무 많다"며 "여기서 오래 일하려면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양씨가 고소한 스튜디오 실장 정모(42)씨가 공개한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면 양씨는 당시 돈이 필요했던 상황으로 보인다. 모델 A씨는 "먹잇감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했다. "촬영 경험이 많지 않은 아마추어 모델에다가 돈이 필요하다는 걸 노출했잖아요. 그때부터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거죠. 그 이후엔 뻔하잖아요."
간혹 급전이 필요한 프로 모델들도 양씨와 비슷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고 했다. "이번 사건 터지고 친한 동생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도 같은 피해를 당해서 사진 유출됐다고요. 돈이 급했대요. 모델 이미지 망쳐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어요. 고소하라고 했는데, 안 한대요. 고소했다는 거 알려지면 사람들이 사진 찾아볼 게 뻔하잖아요. 2차 피해가 겁나니까, 못 한 거죠."
A씨는 그러면서 "돈이 필요해서 모델을 하는 게 잘못된 거냐"고 반문했다. 그는 "일을 했으면 돈을 받는 게 당연한 건데, 일부 사람들은 이걸 이상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사진 찍으라고 했지 만지라고 한 게 아니지 않나. 사진 찍힌 대가로 돈을 받은 거지, 만지는 대가로 돈을 받은 게 아니다"고 했다. 그는 양씨가 토로했던 내용과 비슷한 말을 했다.
촬영자들은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고, 촬영한 모델 사진을 올리고 공유한다. 행사장에서 공식적으로 찍은 사진, 모델의 허락을 받은 사진촬영회 사진 등이 게재된다. 이곳은 현재 어떤 모델이 활동하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되곤 한다. 다시 말해 이런 커뮤니티에 자주 노출되고, 자주 언급이 될수록 모델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경력이 되는 모델들은 그런 거 잘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일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막 데뷔하거나 이쪽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지망생들한테는 어쩌면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죠. 빨리 이름 알리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한테나 있으니까요. 그걸 찍사들도 알아요. 그 심리를 이용하는 거죠. '내가 너 띄워줄게' 이런 거요. 띄우긴 뭘 띄워요. 아무 힘도 없어요, 걔네들.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도 모르는 그런 찍사들이 능력이 있겠어요?"
이런 뻔한 거짓말에도 사회 생활 경험이 전무한 신인 혹은 지망생들은 곧잘 속는다고 A씨는 말했다. 일단 권력 관계를 만들고, '을'을 옥죄는 것이다.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가 저격한 것이 바로 이러한 권력형 성폭력이다. 양씨는 지난 17일 폭로에서 "연기를 한다고 하니까, (스튜디오 실장이) 내가 그 비싼 프로필 사진도 무료로 다 찍어줄 거고, 아는 PD와 감독도 많으니 잘하면 그분들께 소개해주겠다고…"라고 했다.
'바보같이 왜 당하냐' 혹은 '왜 거부하지 못했나' 이 질문은 성폭력 사건과 언제나 붙어다닌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실장 정씨의 '일방적인' 카톡 내용이 공개된 후 양씨에게는 '본인이 찍겠다고 해놓고, 왜 성추행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양씨는 "난 만지라고 한 적 없다"고 했지만, 일부 대중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최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양씨를 무고로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약 15만명이 동참했다.
또 다른 모델 B씨는 "아마 모델 대부분은 양예원씨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이 사진촬영회라는 게 매우 교묘한 수법으로 모델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B씨 또한 스무살 때부터 모델 일을 시작해 현재 모델 경력만 10년이 넘었다. 그는 모델들이 왜 반복된 노출 촬영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지 설명했다.
처음에는 노출 없이 촬영한다. 모델을 안심시킨 뒤 아주 작은 노출을 유도한다. 그 다음에 또 작은 노출을 요구하고, 그 뒤로 또 한 발 더 나아간 노출을…그렇게 점점 수위를 높인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아주 조금이라도 노출을 하게 되면 그 뒤로는 계속 그 사진이 신경이 쓰여요. 그때 실장같은 사람들이 안심시키죠. 절대 유출 안 된다니까 걱정 말라고요. 그런데 그 이후로 또 노출을 요구해요. 터치도 하고요. 모델은 저 사람들이 내 사진을 갖고 있다는 걸 아니까, 압박감을 느끼고 들어주게 돼요. 그렇게 조금씩 빠지게 되는 거죠. 이후엔 협박이 들어와요. '내가 네 사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요. 그러다가 드물게는 극단적으로 이상한 사진까지 찍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양예원씨 건은 이 바닥에서 아주 전형적인 사건인 거죠."
사람들은 또 말한다. 중간에 왜 끊고 나오지 못하느냐고. B씨는 "분위기에 휩쓸린다"고 했다. 그는 "촬영을 해본 사람은 안다. 많은 사람이 나 한 명만 쳐다보고 있고,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분위기라면,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나를 다그치기 시작한다면,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가버린다"고 말했다. "그건 단순히 노출의 문제가 아니라 촬영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고 덧붙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촬영이 끝난 후다. 만약 그 촬영이 노출과 관련이 있다면 모델은 당연히 패닉 상태가 되고, 그때부터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A·B씨는 촬영자들의 성추행이 비공개 사진촬영회 뿐만 아니라 공개된 촬영장에서도 흔하게 발생한다고 했다. 카메라 렌즈가 자꾸 특정 부위를 부각하는 게 느껴질 때도 있고, 노골적으로 밑에서 위로 촬영을 하기도 한다. 모델들은 이런 성추행을 언제나 일정 수준 감수하면서 일을 한다. A씨는 "어떤 찍사는 제 발만 20분 동안 찍더라. 그땐 정말 소름이 끼치고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두 모델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보통 모델들은 정말 지우고 싶은 사진이나 영상이 있으면, 직접 사이트에 일일이 연락해요. 왜냐고요? 그동안 경찰들이 해결해 준 게 없으니까요. 모델들 끼리는 관련 사안으로 경찰서를 갈 때면 항상 대화를 녹음해야 한다고 조언해요. 저희가 호소하는 걸 경찰이 안 들어주는 상황을 녹음하고, 그 내용을 경찰한테 들이대야 말을 들어준다는 게 모델 사이에는 일종의 매뉴얼인 거죠."
jb@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