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이슈] '독립운동의 산실' 안동 임청각 복원 규모는?

기사등록 2018/04/30 06:30:00

현존 문서상 임청각 규모는 4동 68칸

임진왜란과 일제 때 일부 소실…99칸 가능성도

철로 없애고, 기존도로 그대로 활용키로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독립운동의 산실'인 경북 안동시 소재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의 복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사진은 1915년 철도개설 이전 임청각 모습. 2018.04.29 (사진=안동시 제공)photo@newsis.com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의 복원 규모는 얼마나 될까.

원형 복원작업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경북 안동시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임청각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으로 규정하면서 원형 복원사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작년 9월 관계기관과 고성 이씨 문중 대표 등이 참여하는 '임청각 종합정비계획 수립용역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추진위는 같은 해 11월 첫 회의를 열어 임청각 정비기준 시점과 범위 등을 규정했다. 올해 3월 29일에는 2차 회의를 열어 주변가옥정비 및 보호구역 조정 문제 등을 협의했다.

두 차례 회의를 통해 복원의 큰 그림은 이상룡 선생이 생전 거주했던 1910년대 모습으로 결정했다. 1910년 및 1915년 당시 임청각 사진, 1941년 임청각 앞 철도개설 전 계획도, 18세기 임청각 주인이던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1706~1773)씨가 남긴 허주유고(虛舟遺稿) 등의 고증자료도 참고키로 했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독립운동의 산실'인 경북 안동시 소재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의 원형은 옛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진은 18세기 임청각 주인이던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 1706~1773)이 남긴 허주유고(虛舟遺稿)에 그려진 임청각 모습. 2018.04.29 (사진=안동시 제공)photo@newsis.com
임청각 왼쪽 일부분 및 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 등을 포함하는 문화재보호구역도 확대키로 했다. 입구에 기념관도 건립키로 했다.

 임청각 정면 도로의 지하화 문제는 문화재 훼손 우려 등을 이유로 포기하는 대신 현행 도로를 그대로 이용키로 했다.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는 기존 철로는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이 완료되는 2020년 철거된다.

그렇다면 복원될 임청각은 지역에서 회자되던 것처럼 99칸 규모일까. 고성 이씨 문중을 중심으로 안동지역에서 강조하는 임청각의 규모는 '99칸 대저택'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임청각은 이에 못미치는 70여 칸 정도이다.

현재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임청각 크기는 일제 때 작성된 매매계약서에 기록된 68칸이다. 임청각 매매 및 임대(貰借) 관련 문건은 1913년 4월부터 6월 사이 작성한 4건이 전해진다. 이 가운데 가옥의 규모를 기록한 문서는 1913년 4월과 연대미상의 계약서 등 모두 2건이다.

우선, 1913년 4월 1일에 작성한 매매용 계약서에는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용상리 기와집(瓦家) 4동(棟) 56칸(間)'이다. 같은 마을에 있는 법흥원(法興員)과 뒷산(영남산)까지 합쳐 대금 2000엔(円)에 내놓았다.

소유주는 '이상희(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명)'이다. 이 계약서는 그 소유권을 매도할 뜻이 있어 초문서(草文書) 형식으로 작성한 문서다. 매매문기는 값을 치를 때에 완전히 작성해 지급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20세기 초 임청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임대 계약서. 1913년께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계약서에 기록된 임청각의 규모는 68칸이다. 2018.04.29 (사진=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photo@newsis.com
작성일이 분명치 않은 임대용 계약서에도 임청각 규모가 쓰여 있다. 이 문서에는 '안동 부내면 법흥리 제3통 4호 와가(瓦家, 기와집) 68칸(間)을 세차(貰借)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계약함'이라고 기록했다. 이 계약서에는 '세금(貰金)은 매달 ○圓으로 정함' '세차 기간은 ○ 정함' '본 계약은 입처일(入處日)에 위시하여 시행함'이라고 적혀 있다.

임청각은 최초 1519년(중종 14) 형조좌랑 이명(李洺)이 지었다. 세종 때 좌상을 지낸 이원의 여섯 째 아들 이증(1419~1480)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 염증을 느껴 사직하고 안동으로 낙향했다.그의 셋째 아들 이명도 1519년 현감을 사직하고 돌아와 안동부 동쪽 영남산 기슭에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건물을 세우니 이것이 곧 임청각이다.

이후 증·개축이 이어졌다. 이명의 여섯 째 아들인 이굉이 살림집(임청각)을 증축했다고 전해진다. 집을 지은 뒤 73년 만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정유년(1597년) 명나라 군사가 임청각에 주둔할 때 안채에서 화재가 발생해 건물과 중요 문서 일부가 소실됐다. 일제는 중앙선 부설을 핑계로 임청각 전체를 없애려다 여론이 좋지 않자 마당으로 철로를 냈다. 그러면서 또다시 일부가 헐렸다.

이 처럼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훼손되면서 본래 임청각의 원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성 이씨 종친회의 한 관계자는 "훼손되기 이전에는 99칸 대저택이었다"라며 원형대로의 복원을 강조했다.

반면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의 한 관계자는 "99칸 저택이라는 것은 실제 규모가 99칸 이었음을 일컫는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며 "따라서 '집 규모가 매우 크다'라는 상징적 의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분석했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1913년에 작성된 임청각 임대계약서. 이 계약서에는 임청각의 규모를 4동 56칸으로 기록했다. 2018.04.29 (사진=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photo@newsis.com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임청각 복원 규모는 99칸이 아니라 현 규모보다 다소 늘어나는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구체적인 임청각 종합정비계획 수립용역 결과는 오는 10월 말에 나온다.

안동시 관계자는 "임청각 복원은 국민들의 관심이 높고,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이에 따른 예산확보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오는 10월 말께 최종 용역결과가 나오면 복원 규모 및 시기가 구체적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kjh9326@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