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때 폭약 분리해 광주 지킨 문용동 전도사 삶 재조명해야"

기사등록 2018/04/18 16:52:28

"시민 생명 지키기 위해 군 당국에 폭약 뇌관 제거 도움 요청"

군당국 문 전도사 매수자로 발표해 프락치 누명…재평가 필요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8일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고 문용동 전도사 기록물 위탁관리 협약서 체결식이 열리고 있다. 문 전도사는 1980년 5·18 당시 옛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에서 광주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폭약 뇌관을 관리하다 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숨졌다. 2018.04.18.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에서 광주시민의 안전을 위해 폭약을 관리하다가 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숨진 문용동(당시 29세·전도사)씨의 삶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폭약 뇌관을 분해해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한 문씨를 군 당국이 프락치로 둔갑시켜 문씨의 의로운 행동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이 18일 '고 문용동 전도사 기록물 위탁관리 협약서 체결식'을 열며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문씨는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구타당한 노인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도왔다.

 호남신학대 4학년이자 광주제일교회 전도사였던 문씨는 이 때부터 부상자 구호와 헌혈 활동을 하며 항쟁에 참여했다.

 옛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계엄군에 희생당한 시민 32명의 주검을 보고 공분, 80년 5월21일 결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들어갔다.

 5월23일부터 옛 전남도청 무기고 관리반(일명 폭약관리반·총 9명 참여)에서 활동했다.
 
 문씨는 당시 동료들에게 "폭약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폭약관리반원 김영복과 계엄사를 찾아 뇌관 (분리) 작업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문씨 등 폭약관리반은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고의 안전을 위해 폭약 뇌관을 제거하면 어떻겠냐"고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과 협의했다.

 5월24일 도청 무기고에 있던 폭약 뇌관 2288개를 가져가 전교사에서 보관하도록 넘겨줬다.

 문씨 등 일부 관리반원은 5월25일 오후 1시까지 군 폭약 전문가인 배승일 병기근무대 기술문관(탄약검사사)과 수류탄 신관 279발, 최루탄 170발, 다이너마이트 2100개의 뇌관을 모두 해체했다.

 문씨는 5월27일 새벽 진압에 나선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문씨는 당시 가장 먼저 투항하다가 총격을 당했고, 무기고 경계에 참여한 나머지 8명은 체포됐다. 문씨는 5월26일 옛 도청을 찾아온 가족에게 '이곳을 끝까지 지키겠다'며 귀가하지 않았다.

 김형석(통일과 역사 연구소 소장) 박사는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라는 소논문에서 "군이 문용동의 순수한 희생을 왜곡하고 계엄군 프락치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고 분석했다.

 계엄사령군이 80년 5월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에는 "군이 희생을 치르면서도 폭발장치 뇌관을 빼어 못 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기록돼 있다.

 문용동씨를 '군이 매수한 부화뇌동자'로, 배승일 기술문관을 '폭도로 가장해 침투시켰던 요원'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문씨는 시민사회에서도 "계엄군들이 정보요원들을 시켜 다이너마이트를 제거시켰다"며 공작요원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문씨의 일기와 시민군의 증언 등을 분석한 김 박사는 "계엄당국이 무력 진압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폭약관리반의 활동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또 "문용동 등은 촛불을 켜고 폭탄 뇌관을 분리하며 폭약 뭉치를 분해해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했다. 폭약이 폭발하면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며 "이후에도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행동은 계엄군과 내통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8일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고 문용동 전도사 기록물 위탁관리 협약서 체결식이 열리고 있다. 문 전도사는 1980년 5·18 당시 옛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에서 광주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폭약 뇌관을 관리하다 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숨졌다. 2018.04.18.  sdhdream@newsis.com

 5·18기록관은 이날 위탁관리협약식에서 '고 문용동 전도사 유가족과 순교기념사업회'로부터 일기장 6권, 수첩 등 문서자료 24점과 사진자료 73매, 가방 등 유품 3점을 받았다.

 5·18기록관은 문씨의 의로움이 담긴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다음 달 5·18 38주년을 맞아 전시할 예정이다. 5·18기록관과 기념사업회도 "신군부가 문씨를 매수자로 발표해 누명을 썼다"며 역사적 재평가를 당부했다.

 협약식에 참석한 김영복(5·18 당시 폭약관리반원)씨는 "80년 5월27일 (자신)바로 앞에서 희생당한 문씨를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을 수 없다. (프락치란 누명을 쓴)문씨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의갑 5·18기록관장도 "문씨는 광주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며 "그의 평화 정신과 의로움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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