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력 상실, 4·5층 침수에야 靑 1보 초안 작성
학생들 간신히 기댄 채 절규할 때 朴 연락 안돼
관저서 상황보고서 전달받은 인물은 요리 담당
별도 보고 없이 침실 앞 탁자 위에 그냥 올려놔
안봉근 불러 朴 침실 나왔을 땐 골든타임 지나
10시30분 완전 침몰, 朴 오후 5시15분 중대본에
"구명조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 힘듭니까?"
청와대에서 굿판을 벌였다거나 성형시술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등의 의구심 등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국가 재난 위기에서 컨트롤 타워가 돼야 할 대통령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최근 검찰이 밝힌 2014년 4월16일의 '숨겨진 7시간'을 살펴보면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왜 대통령의 행적을 감추려 오랫동안 거짓말에 급급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일 검찰 등에 따르면 오전 8시52분께 세월호가 좌현으로 30도 가량 기울어졌다. 2분 뒤인 54분 단원고 최모 학생이 119에 사고 사실을 신고했다.
신고 이후 흘러나온 선내 안내방송에는 "가만히 기다리라"는 지시가 있을 뿐이었다. 발빠르게 사고를 알려 다른 승객들의 목숨을 살린 최군은 안내방송을 따랐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9시19분에야 TV속보를 통해 사고 발생사실을 알게 돼 24분께 청와대 발송시스템을 이용해 문자메시지를 발송했다.
이후 배가 77.9도 전도된 상황에서 선실 탑승객 김모씨 등 11명이 탈출한 약 10분의 시간 동안 김장수 전 실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를 받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세월호 양대홍 사무장이 아내와의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승객을 구조하러 기울어진 선체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르바이트생과 학생들을 탈출시키고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3층 중앙 선원식당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단원고 학생인 박모군이 10시11분 찍은 사진엔 잔뜩 긴장한 얼굴의 학생들이 침대와 바닥, 벽 등에 간신히 기대 있었다. 당시 객실에는 물이 다 차지 않아 신속한 구조가 이뤄졌다면 학생들은 뭍을 밟을 수 있었다.
배가 점점 가라앉고 있는 동안 어린 학생들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 위해 사투(死鬪)를 벌였다. 목청껏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외침으로 해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런 긴박한 순간에도 정작 대통령이 머물던 청와대 관저는 평온하리 만큼 정적이 흘렀다.
급기야 연락이 닿지 않는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전하기 위해 상황병은 뛰어서 관저에 도착했다. 그가 청와대 내실에서 박 전 대통령의 식사 준비를 했던 김막업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한 시간이 10시20분께다. 김씨는 평소와 같이 별도의 구두 전달 없이 박 전 대통령의 침실 앞 탁자에 보고서를 올려뒀다.
10시22분께 김장수 전 실장에게 전화한 박 전 대통령은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여객선 내 객실, 엔진실 등을 철저히 수색해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는 원론적인 지시만 내렸다.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한 것은 10시30분이다. 목포와 제주해경 헬기는 10시35분까지 수백명의 승객 중 35명을 구조했다.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다가 오후 2시15분 최순실씨와 문고리 3인방 5명이 회의를 한 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키로 결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화장과 머리손질을 담당하는 정송주, 정매주씨를 불러 준비를 마친 후에야 오후 4시33분께 관저를 출발했다.
5시15분에 중대본에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는 오후 6시께 관저로 돌아왔다.
이 시각, 세월호는 수면 위 선수 일부만 남고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