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가 이론을 제기했다. “애국가는 좌옹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 = 글쓴이는 국가(國家)가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인정하느냐에 주목할뿐 작사자 논쟁에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기존의 ‘흥사단’이나 ‘순흥안씨’라는 진영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독립협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근대사학자의 글이라는 점에서이다.
역시 기대했던대로 진영논리는 배제되었다. 이에 크게 안도했다. ‘친일파’가 작사하였으니 폐기하자는 주장을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협회, 독립운동사, 독도, 고대사 연구자라는 기대에 의한 학문적 융합력은 확인되지 않아 크게 실망을 했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 검토도 없고, 기본적인 사료의 교차 검증조차 하지 못했고, 학술원 회원이라는 권위를 휘두르는 흔적까지 읽혔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EBS와의 인터뷰에서 “학자에겐 학자적 양심이 있다”고 하며 연구, 교육, 봉사로 살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 글에서는 학자적 양심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큰 실망감에 약속을 깨고 비판을 하게 되었다.
◇선행연구 검토 없는 허약한 글
학자의 글은 선행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스스로 표현했 듯이 ‘뜨거운 논쟁’이 있어 온 문제인 데도 글의 내용에서나 참고문헌에서 2015년 이후의 연구 결과와 자료 발굴 기사 등을 도외시했다. 2015년 발간된 단행본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신동립)과 2015년 흥사단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 애국가 작사 연구’(김연갑), 2016년 서울신학대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 작사 증거 10가지’(김연갑), 2017년 명지대 국제한국연구소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연구’(김연갑)를 간과했다.
이를 의도적 회피로 본다면 심사도 없는 회원지에 심심풀이로 쓴 글이거나 연구자적 자세를 잃어버린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본체 격인 “애국가 가사의 내용분석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의 결과는 사상누각이다. 왜냐하면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방법은 주로 자료수집과 ‘증언’ 청취에 의존했다가 실패했으므로”라는 전제가 틀렸기 때문에 이로부터 얻어진 결과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다음의 주장들이 그렇다.
1. 외국 출판사의 문의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통보한다는 1955년 4월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대해 타 신문들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작사자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듬해 1956년 8월31일자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렸다. 16개월 간의 조사결과이다. 즉, 제3차 회의(1955.7.28)에서 조사위원 19인 중 13인이 출석한 자리에서 작사자를 윤치호로 확정 발표하자는 것에 대해 표결을 했다. 결과는 윤치호 확정 11 대(對) 미확정 2로 나왔다. 확정을 반대한 이유는 “내가 작사자다”라고 주장한 김인식이 생존해 있고, 만의 하나 “거부(拒否)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타 작사자가 출현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정(假定)”해서였다.
분명한 것은 ‘윤치호 11 대 안창호 2’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 교수님은 이를 “11(윤치호) 대 2(안창호)로 만장일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하여 “정부는 결국 애국가 ‘작사자’를 또 다시 ‘未詳(미상)’으로 결론지어 발표하였다”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한 것이다. 기존에 이런 주장이 있었으나 최근에 바로 잡혔다. 신 교수님은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
2.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자필 애국가 가사지(1907년 작)의 진위에 대한 감정을 받기도 하고, ‘찬미가’를 공개적으로 찾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윤치호씨로 결론, 애국가 작사자에 종지부, 국사편찬위원회 불원 문교부 장관에게 보고하리라 한다.”(국도신문, 1956.8.31)
3.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는 자료집이지 결과보고서가 아니다. 이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1955년 5월13일이다. 신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회는 1955년 5월11일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편성하고”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2일 만에 조사결과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국사편찬위원회는 경과보고서를 제출하고” 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수용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조사자료’를 ‘조사결과 보고서’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는 신 교수님 글의 전제가 틀린 것으로 이에 근거한 모든 주장은 허망한 것이 되는 것이다.
4. 신 교수님은 현 애국가와 동일한 후렴의 ‘무궁화가’에 대해 “현재까지는 ‘무궁화가’의 작사자도 불명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아리랑의 예에서와 같이 후렴이 같으면 같은 노래로 보는 음악 일반론은 알고 있으니 같은 후렴을 쓰는 ‘무궁화가’가 윤치호 작이어서는 안 된다고 보아 이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도 틀렸다. 1897년 7월13일 정부와 독립협회가 서대문 독립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제505회 조선 개국 기원절 경축행사에 대해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며 독립신문 사장인 서재필이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의 편집자주(Editorial Notes)에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으로 시작되어, 독립협회 안경수가 인사말을 하고, 외국인 참석자들이 소개되었다. 와병 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가’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시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연주한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 불렀다. (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i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F. Scranton on the organ)
‘무궁화가’를 ‘National Flower’로 표기했고, 이를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iate of Korea) 윤치호(Mr. T. H. Yun)가 행사를 위해 작사했다고 밝혔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단행본과 논문에서는 조선개국 기원절 행사에서의 윤치호 역할에 대해서는 물론, 이 기사의 전후 맥락을 자세히 서술했다. 그러므로 신 교수님은 선행연구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독립협회 연구자가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 영문판도 텍스트로 수용하지 못한 것이니 허망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 신 교수님은 대성학교 개교 시기보다 현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발행된 시점이 앞선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찬미가’ 재판은 1908년 6월25일 발행되었다. 그런데 신 교수님은 “1908년 9월26일 대성학교를 개교하자 윤치호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안창호 자신은 대리교장으로 실제 실무를 담당하면서 창작해 놓은 애국가를 윤치호 교장에게 보이어 동의를 받고 애국가를 공개하여 보급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라고 하였다. 이미 3개월 전에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수록된 애국가를 안창호가 지어 보였다고 하였으니 어불성설이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물론 이의 오류도 선행연구에서 이미 바로 잡힌 것이다.
7. 1945년 10월18일 임시정부 주석 명으로 중국 충칭의 음악월간사가 펴낸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 韓國愛國歌)’에서 김구가 애국가의 고사(故事)을 간략하게 밝혔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창작되었는데 한 한국애국지사의 수필에서 나왔으나 단 이미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신 교수님은 이 대목을 인용까지 하고는 아무런 해석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1945년으로부터 50년 전이라고 했으니 1896년이 된다. 이 시기는 ‘무궁화가’를 작사한 1897년에 근접한 시점이고, 안창호의 나이로는 가당치가 않다. 결정적으로는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김구가 작사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할 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윤치호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 역시 선행연구에서 밝혀 놓았음은 물론이다.
8. 역술(譯述)의 문제이다. 애국가, 무궁화가, 그리고 또 한편의 애국찬미가가 수록된 ‘찬미가’의 판권에는 융희(隆熙) 2년(二年) 6월20일 재판 인쇄, 25일 발행, 역술자 윤치호(譯述者 尹致昊)로 되어있다. 여기서 ‘역술’은 번역의 유사 개념인 번안과 다르게 당시 지식 수용과 주체화 과정에서 일부는 번역하고 일부는 자기 지식을 반영한 ‘번역과 일부 지음’의 합성어이다. 굳이 ‘번역(飜譯)’이란 용어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 분명히 전체 번역에 일부 창작(저술)이 포함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입된 용어로 1895년 ‘제국문학’ 8월호 ‘번역의 진상(眞相)’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술을 설명하였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역술의 실례는 현채(玄采·1856~1925)의 역술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다. 일본인 임태보(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저에 없는 단군사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등을 끼워 넣었다. 또한 원저의 결론과는 반대로 임진왜란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서술했다. 이렇게 일부를 지어 넣은 경우이다. 윤치호가 찬미가를 ‘역술’로 한 것은 서양 찬송가 12편을 ‘역(譯)’하고, 3편을 창작 한 것을 ‘술(術)’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번역’이나 ‘편집’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이다. 무궁화가가 명확한 술이니 애국가 외 한 편도 술인 것이다.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많은 책을 읽었으니 이런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티호’ 작사 표기
1914년 미국 ‘태평양잡지’ 윤치호 작사로 기술
1931년 한석원 편저 ‘세계명작가곡집’ 윤치호 표기
1909년 이기재 소장 창가집, 윤치호 작사로 표기
1920년대 김종만 소장 필사 가사집, ‘윤선생 치호’로 표기
1910년 일본유학생회 ‘윤치호 작 새 애국가’ 기록
1911년 ‘105인 사건’ 관련 경기도 경무보고서에서 ‘윤치호 구작(舊作)’
1914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보고 제143호에 ‘윤치호 작’
신문잡지, 필사본, 일제 조사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한 것들 중 일부이다. 이들은 최근 신문과 통신을 통해 기사화된 것들로 검색 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자료들이다. 바로 이런 자료의 증거력을 극복하기 전에는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신 교수님이 이에 상응하는 안창호 작사 표기 자료를 한 건도 발굴하지 않고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물론 작사하지 않았으므로 기록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료의 교차 검증 없는 글
1. 신 교수님은 교차 검증이 필요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했다. “도산은 귀국 도중에 일본 동경에서 체류 중인 유길준(俞吉濬)을 예방하여 애국가 작사를 요청한 사실에서 보거나 균명학교 등의 강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애국가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모두 고사하므로 스스로 작사할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의지가 있었던’ 것과 실제 작사한 것은 엄연한 별개 문제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신 교수님과 같이 근대사 자료를 중요한 연구 자료로 삼는 학자들의 비겁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제 솔직히 그동안 은폐해 온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따로 있고, 그것은 현 애국가와 다른 것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가’의 존재에 대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창호와 가까운 인물들이 일찍이 ‘안 선생이 자작자음한 애국가’로 증언이 있지 않았던가? 부디 안창호설로 가려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학자적 양심으로 윤치호를 정위시켜 놓길 바란다.
2. 일본 외무성 자료를 인용했다. 외사경찰이 보고한 자료에 애국창가 9곡을 적시하며 애국가, 국기가, 국민가는 “평양 대성학당 생도 중에서 불라디보스토크에 작년에 온 조선인의 작(作)이라고 하고 애국가의 내용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애국가와 대성학교와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의 “애국가와 대성학교와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라는 부분은 대성학교 개교 이전부터 찬미가 소재 애국가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으로부터 기독교계 학교에 널리 퍼져 불려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같은 해석은 1915년 문제가 된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이 압수되어 교사 이상춘 등과 이웃 학교인 호수돈여학교 교사까지 피체된 사건이다. 처음 40부를 찍고, 이어 99부를 찍어 보급하다 1917년 9월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경죄 등의 죄목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건 기록에는 “한영서원 불온문서 발각 윤치호 작 애국가 등 불온 창가집 인쇄 1부 40전”이 확인된다. 이는 앞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 정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직접적인 기록이다. 교차 검증을 했다면 강조할 자료가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학자적 양심’ 없이 권위로 누르는 글
신 교수님은 자신이 해제를 쓴 국가보훈처 수집 1914년 길림성 소영자 소재 광성중학교 교재 ‘최신창가집’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신창가집(最新唱歌集)에는 152곡의 애국창가를 수집 수록하면서 도산 안창호의 가사 ‘애국가’를 첫 머리에 그대로 ‘국가(國歌)’로 제목을 바꾸어 수록하였다”라고 했다. 현 애국가를 ‘국가’로 표기한 자료를 ‘도산 안창호의 가사’라고 했다. 1996년 해제에서 언급하지 않은 애국가 작사자를 20여년이 지난 2018년에 와서는 ‘도산 안창호의 가사’라고 억지를 폈다. 사실에 의거한 주장이 아니라 내가 해제를 쓴 책이라고 자의적 표현을 한 권위적 주장이다.
이런 태도는 결론 부분에서 “오랫동안 뜨겁게 논쟁해 온 주제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기 때문에, 이 견해에 대한 학술적 검토 이외에 다른 시비는 사양한다”라고 했다. 그동안 논쟁은 ‘학술적 검토’가 아니었으니 자신의 주장만 들으라는 말인지, 뜨겁게 논쟁해 온 주제이니 자신의 주장으로 끝을 내라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학자적 양심’은 읽히지 않고 권위적 주장으로만 읽힌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족을 달고자 한다. 신 교수님의 ‘애국가 가사 내용의 비교’는 잘못된 전제로 설한 것이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판을 한다. 제1절 ‘하나님이 보우하사’의 ‘하나님’을 안창호 기록에서 찾기 바란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안창호는 기독교인이지만 신앙고백이 없다”고 한다. 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누가 무겁게 썼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소중하다. 또 다른 ‘신 교수님’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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