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조선 후기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노론과 온건한 입장의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한 때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명재 윤증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되어 정국을 이끌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윤휴(1617~1680)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송시열에게 보낼 '신유의서'를 작성했다. 윤휴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오랜 벗이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윤증과 송시열의 이러한 갈등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며,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산림으로,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던 명재 윤증(1629~1714)의 삶과 글씨를 볼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 서울서예박물관 기획시리즈 '한국서예사특별전 34번째로 '명재 윤증'전이 열리고 있다.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두 점의 보물이 전시됐다. 윤증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초상 5점과 초상 제작관리 내력이 상세히 적힌 '영당기적'은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일괄 지정됐다.
이번 전시에는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과 함께 전시됐다. 윤증의 초상은 생전에 변량이라는 화가가 처음 그린 후 윤증 사후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782년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윤증에게 내린 '복관 교지'도 볼 수 있다.
윤증은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적,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지방에 거주하며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그를 두고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조선 19대왕 숙종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윤증에게 '우의정'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사에서 윤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치열한 논쟁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화합과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의 집안은 명문가이면서도 명필(名筆)가였다. 그의 큰아버지인 동토 윤순거(1596~1668)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보물 제1671호다. 또한 큰아버지 윤문거, 아버지 윤선거 역시 글씨가 뛰어나 삼형제의 글씨를 모은 '노성3선생필적'에는 박세당, 박세채 등 당대 이름난 인물들이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 역시 가문의 영향으로 빼어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다.
이번 전시에는 '명재 친필 주자시' '명재 친필 8폭병풍'등의 작품을 통해 윤증의 경쾌한 초서를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5월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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