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 단색화로 더 이상 신선한 충격이 보이지 않던 미술시장에 경악할 만한 작품이 등장했다.
황재형 화백(65)이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작이다. '탄광촌 화가'로 유명한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 국내 손꼽히는 정통 리얼리즘 구상 작가의 반전이다.
국내미술시장을 이끈 팝아트 작가들이 청바지, 쌀, 면봉, 실타래,크리스탈등 다양한 재료로 작업한 것은 애교다.
물감이 아닌 오로지 머리카락 한올한올로 완성한 작품은 놀라움과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엉키고 뭉친 머리카락으로 수놓은 인물과 풍경은 더 이상 인물화나 풍경화가 아니다. 황재형표 체험 삶의 현장내음이 진득하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아트센터는 머리카락을 재료로 온전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세계 최초라는 입장이다. 이전 유태인의 머리카락으로 옷을 만들고 침대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디자인 차원에 속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을 타이틀로 오는 14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7년만의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다.
전시를 앞두고 만난 황재형 화백은 의연했다. '작품이 오싹하다'고 하자 "배타적이서 그렇다"며 편견에 젖은 기자의 타성을 나무랐다.
그는 "머리카락은 이미 피자 비스킷 햄버거에 시스틴으로 들어가 있어 우리가 이미 먹고 있다"면서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워 한다는 것은 이 시대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민중의 모습을 거친 질감으로 승부했던 유화물감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 화백은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현존체이자 생명력"이라면서 "왜 인간은 머리카락처럼 살수 없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머리카락에 깃든 '평등의 미학'을 말했다.
"한 인간의 머리카락의 숫자가 10만개정도 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개가 빠져도 끄덕없는 머리카락을 인간은 지니고 있죠. 10만여개의 머리카락이 아무 불평없이, 아무때나 동일하게 나지는 않아요. 한날 한시에 태어나는 머리카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이 탈모되지도 않아요. 원형탈모도 차츰차츰 빠집니다.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그렇게 평등한 머리카락이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0만개의 머리카락이 인간 생명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표징"이라고 강조했다.
"머리카락을 뚝 떼서 분석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역사를 가져왔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그는 "사람들은 머리카락 혐오증이 걸렸는지 쓰레기통에 확 버리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내 것도 타인의 머리카락도 성스러운 존재로서 귀하게 여길수 밖에 없는 선물로, 후대에 물려줘도 좋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무한한 표현재료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은 '일상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예술이 된 머리카락'은 태백의 미용실을 순례하면서 모았지만 차츰 주변사람들이 나누어줬다.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은 완성한 작품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기뻐하더군요. 무엇보다 자신이 참여한다는 생각때문에 들뜨시기도 하고…잘 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머리카락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저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요라고요."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이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판매까지 한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아직 (그렇게까지 태백 지인들)자본화되어 있지 않다"며 에둘러 표현했다.
탄광촌 광부와 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캔버스에 담은 작가지만 그들의 참된 삶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미안한 감정이다.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는 머리카락을 이용한 작업은 작가 자신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붓과 색채를 이용한 작업보다 더욱 생생한 표현력의 힘이 됐다 .
황재형은 자신의 그림과 현실이 하나임을 증명한 작가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이종구·송창 등과 조직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동인으로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한 1980년대 민중미술 대표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대학시절 반 고흐의 초기작 감자를 먹는 광부가족에 마음을 빼앗겼다.1988년 돌연 태백으로 내려갔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16년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야학교사, 공장등을 전전하다 오지 태백으로 들어간 그는 막장에 들어갔다.
탄광촌에서 살며 석탄을 캤다. 하지만 그는 화가였다. 당시 길가, 풀섶, 하천등 아무데서나 풀썩 앉아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똥물 화가’로 불렀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낸 작품들은 그를 '광부 화가'로 등극시켰다. 시커먼 광부의 초상중 ‘한숟가락의 의미’는 경외감을 전하며 새로운 '민중미술'의 길을 열었다.
탄광촌과 탄광사람들을 재현하는 그는 현실의 삶속에서 민족의 역사를 조명한다. 10년전 탄광촌 선탄부들의 목욕장면을 훔쳐본 후 화가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다.
문틈 사이로 마주한 '알몸의 현장'은 그를 해탈하게 했다.
"비누칠과 샤워로 시커먼 물이 흘러내리는 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어요. 인간의 피부가 아주 싱싱하게. 물비늘처럼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특히 남편이 죽은 다음에 건강한 노동으로 가족들과 미래를 다지고 있다는 것, 그 현장, 그 몸, 그 몸의 아름다움, 그 몸의 진실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싶었죠."
욕탕문앞에서 욕망이 양심과 대결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꼭 그렇게 해야겠어, 상상해서 그려" vs "현장의 디테일은 다르지. 정말로 확연하게 보고 싶다"
30분간 문을 잡고 실랑이 하던 그는 결국 무릎 끓고 울고 말았다. "내가 이런 현장을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직관력이 있다면 화가로 살 것이고, 선탄부들 음모까지 그리면서까지 인간의 진실을 꼭 그린다면 나는 화가로서 재능이 없을수 있어. 그렇게 인식될때까지 한없는 나의 퇴페성에 눈물을 짜냈어요."
그는 "중요한 건 이 시간까지 그 부끄러움은 삭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했는데 그것들을 삭혀주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의 생명성이었고,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라고 고백했다.
묵직하게 말을 잇던 그가 느닷없이 종이박스를 열어 액자를 꺼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액자에는 한 여인이 꽃무덤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으로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동시에 들어있다. 광부 화장실에서 놓여있던 거울이었다. 이사를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황 화백이 '절도'한 물건이다. 사진속 여인은 1968~1969년 정도 스타일로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순수한 심성을 봤다"며 액자를 애지중지 다뤘다.
"'일반인들이 예술이더라'. 그게 가슴을 쿵 쳤다"고 했다.
무슨뜻이냐고 하자 황순원 선생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했던 말로 대신했다. '우리가 정작으로 예술로 드러내야 할 건 누이의 누런 이다.'
"제가 찾고 싶었던 건 바로 삶속에서 이런 순수함, 순수한 심성, 인간정신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내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까닭입니다."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제작한 작품앞에서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털보' 황 화백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잠시 들어올리자 민머리가 반짝였다. "제가 대머리라서 타인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하하"
징그럽고 혐오감을 유발하지만 희귀함을 탑재한 머리카락 작품이 얼마나 팔릴지도 주목되고있다. 황 화백 유화 작품값은 100호 경우 4000만원~5000만원선이다. 전시는 2018년 1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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