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 김성녀의 마지막 콤비 플레이, '트로이의 여인들'

기사등록 2017/09/10 10:57:05
【싱가포르=뉴시스】 안호상 극장장 & 김준수.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이재훈 기자 = 국립극장 안호상(58) 극장장과 국립창극단의 김성녀(67) 예술감독은 창극의 현대화·세계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들이다.

지난 7~9일 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에서 공연하며 큰 호응을 얻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두 사람이 시너지를 발휘한 결정체다.

트로이 전쟁 관련 신화와 전설을 기반으로 싱가포르 예술축제의 옹캉센 예술감독이 연출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이야기의 국제적인 보편성과 함께 창(唱)의 본질을 가장 잘 살려냈다는 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국립극장과 싱가포르 예술축제가 합작한 결과물이다.

현지 첫날 공연을 끝내고 다음날인 8일 싱가포르 호텔에서 만난 안 극장장은 "다른 나라와 창극을 공동제작한다는 것은 처음이라 두려운 일이었다"면서도 "트로이의 여인들은 양 나라의 예술가들이 작품의 시작부터 과정까지 튼튼하게 합작을 해왔다"고 만족해했다.

"한국적인 콘텐츠를 외국에 가지고 나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양국의 수교 기념 공연과 자체 비용으로 극장을 빌리는 것 등도 있지만 현지에서 보면 정보가 많지 않아 낯설 수 있어요. 현지 문화예술계 전반에 지명도가 있는 예술가나 공간의 인지도를 찾아서 문화적인 깊이가 있는 관객들을 만나면 한 번 하는 공연이라도 현지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지난해 4월 프랑스 파리의 중심 극장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공연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연출 고선웅)가 대표적인 사례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같은 문화권인 아시아에서 공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유럽에서 공연하는 창극에 어쩔 수 없이 배어있을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완전히 탈피, 작품으로만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뉴시스】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 .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안 극장장은 "그간 창극이 아시아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 주력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아시아 예술이 우선 풍성해지려면 아시아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교류를 통해서 우리를 먼저 발견해가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극장 객석에서 추임새를 넣었던 김 감독은 "얼씨구절씨구라는 추임새를 넣어도 싱가포르 관객분들이 당연하듯이 받아주시더라"고 웃었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공연 직전 "시집 가는 것처럼 떨린다"고 했던 김 감독은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공연을 앞두고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 어느 나라에서 공연해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특히 옹켕센 연출의 창극에 대한 이해에 대해 높은 점수를 줬다. 그녀는 "다른 외국 연출가와 작업할 때는 일단 판소리가 무엇인지 대해 알려드려야 했는데 옹켕센은 우리 전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면서 "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우리 판소리를 얹어도 안심이 될 정도로 우리 것에 대한 공부가 잘 돼 있었다"고 했다.

예술경영 1세대로 통하는 안호상 극장장은 '공연기획통'이다. 198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 공채 1기로 입사하면서 공연계에 발을 들였다. 1987년 예술의전당의 개관을 성공적으로 도왔다.

예술의전당의 요직과 서울문화재단 대표 등을 거쳐 2012년 1월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부임한 후 공연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싱가포르=뉴시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자체 제작 공연으로 1년을 채우는 '레퍼토리 시즌제' 도입으로 공연계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을 재해석해서 현대화하는 작업으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창극에게 스트라이커 중책을 맡겼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냈다.
  
안 극장장과 찰떡궁합의 호흡을 과시하는 김 예술감독 역시 국립창극단의 성공적인 변화를 일궈낸 주인공이다. 2012년 예술감독으로 부임, 성과를 인정받아 연임해 6년째 창극단을 이끌고 있는 김 감독은 스릴러 창극 '장화 홍련', 그리스 고전을 바탕으로 한 '메디아', 브레히트의 희곡을 바탕으로 재일교포 정의신이 연출한 '코카서스의 백묵원', 루마니아 출신 미국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의 '춘향'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잇따라 선보였다.

전통을 중시하는 일부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같은 작품성, 대중성, 실험성을 모두 잡은 작품들을 선보이며 입지를 굳혔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안호상·김성녀 콤비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공연이 마지막 시너지가 됐다. 안 극장장이 사의를 표했다는 사실이 7일 공연 직전 알려졌기 때문이다. 

안 극장장의 연임 임기는 2020년 1월까지로 2년여 남아 있었다. 지난 4일 문화체육관광부에 사표를 낸 안 극장장은 22일까지 국립극장에 출근하고 이후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일부 포털사이트에서 안 극장장의 사임 소식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업계를 넘어 일반 대중의 관심은 컸다. 한국에서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싱가포르에 있는 안 극장장의 휴대폰은 쉴 틈이 없었다.

대부분 통화에서 아쉽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늦게 소식을 안 국립극장 내 다른 전속 단체들의 단원들 역시 서운함을 표시하며 부랴부랴 안 극장장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안 극장장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부임 전까지 국립극장에 산재한 전속단체 노조, 인턴 단원, 오디션 등의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급작스런 사퇴가 정권 교체에 따른 문체부의 압박 때문 아니냐는 일부의 시선에 안 극장장은 "문체부도 제가 사표를 내서 당황했는데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할 사람이 급하다고 해서 저 역시 급하게 내린 결정이에요.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 수 있는 기회였고, 제 인생의 마지막 도전과 미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감독도 "안 극장장님이 계셔서 창극단이 많이 힘을 받았는데 아쉽다"고 했다. 이에 안 극장장은 "오히려 제가 김 감독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공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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