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다 비가 더 공포"…폐지 노인들 힘겨운 여름나기

기사등록 2017/08/20 11:23:51
【서울=뉴시스】 이재은 기자 = 지난 10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거리에서 조금례(가명·75)할머니가 폐지를 담은 리어카를 끌고 있다.
열사병에 거리서 쓰러져…비 오면 젖은 폐지 반값
"날씨 걱정 사치, 생계 걱정에 하루도 쉴 수 없어"
갓길서 위험한 순간 빈번…교통사고 무방비 노출
"지자체, 경제적 뒷받침할 실질적 정책 강구해야"

 【서울=뉴시스】 이재은 기자 = "덥고 비 온다고 쉬면 밀린 월세와 공과금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인생인걸. 폐지 줍는 게 훨씬 맘이 편해."

 지난 10일 오전 5시30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거리에서 만난 조금례(가명·75) 할머니는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리어카를 끌며 골목길에 버려진 종이상자를 줍고 있었다.

 빠듯한 생활 형편에 폐지를 줍기 시작한 지 올해로 3년째라는 조 할머니는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해 날씨 걱정은 '사치'라고 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16시간가량 폐지를 줍는다. 동이 막 튼 이른 시간임에도 무더웠던 이날 조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쳤다.

【서울=뉴시스】 이재은 기자 = 지난 10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고물상 앞에서 노인들이 리어카에 가득 싣은 폐지를 팔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낮에도 쉴 수 없는데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워 머리가 빙빙 돌더라"면서 "낮에 잠깐이라도 쉬려면 새벽에 일찍 나와야해. 어떤 노인네는 밤새 한숨도 안자고 폐지를 줍는 걸..."이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7~8월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폭염에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폐지 줍는 노인들은 유독 힘겨운 여름을 보냈다.

 전국고물상협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폐지 수거 노인은 15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기초연금 20만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턱없이 부족해 거리로 나온 70세 이상 고령자들이다. 폐지 가격은 1㎏당 100원 남짓. 이들이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아 얻는 수입은 2000~6000원 정도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20만원을 채 벌기 힘든 실정이다.

 조 할머니도 이날 오전 내내 돌아다니며 리어카가 넘치도록 폐지를 모았지만 손에 쥔 돈은 고작 4000원이었다. 적은 액수임에도 그는 "오늘은 운이 좋아 음료수 캔, 소주병을 주워 평소보다 많이 받았다. 보통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5000원 정도 번다"면서 "낮에 잠깐 쉬었다가 3시부터 다시 돌아다녀야지"라고 웃으며 말했다.

 3평짜리 쪽방에 홀로 산다는 조 할머니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설상가상 하나뿐인 아들마저 3년 전 사업이 망해 연락이 끊기면서 폐지를 줍게 됐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배우지 못해 까막눈이고 나이도 많아 식당 주방일 하기도 어려워. 아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짐까지 되고 싶지 않아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지"라며 눈물을 흘렸다.

 소나기가 내린 지난 14일 오후 봉천동의 한 고물상 앞에서 만난 김만수(73) 할아버지. 그는 낮 기온이 35도 이상으로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에도 대낮에 쉬지 않고 폐지를 주웠다고 했다. 그때는 더위가 빨리 한풀 꺾이길 바랐다. 그러나 최근 비가 자주 오자 김 할아버지는 "차라리 폭염이 훨씬 낫다"고 토로했다. 폐지가 비에 젖게 되면 무게가 많이 나가 옮기는데 훨씬 힘든 반면 값은 절반 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을 하는 자녀가 있는 탓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한 김 할아버지는 6년 전 당뇨를 앓아 병원비를 벌기 위해 폐지를 줍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니다보면 땀이 나서 추위를 잊게 되는데 여름에는 기력이 떨어져 조금만 걸어도 눈앞이 핑 돌고 숨이 차서 버거워. 게다가 올해는 소나기까지 자주 내려 더 힘들어. 고물상에서 젖은 폐지는 잘 받아주지도 않거든···."

【울산=뉴시스】구미현 기자= 지난달 27일 울산 유곡119안전센터 소속 권순재 구급대원이 폭염 속에서 폐지를 줍다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70대 어르신의 리어카를 대신 끌고 있다. 권 대원은 이날 병원까지 약 200m 가량 리어카를 직접 끌고 갔다. 2017.08.02. (사진=울산중부소방서 제공)   photo@newsis.com

 열악한 날씨 조건 속에서도 폐지 줍는 노동을 강행하다 보니 거리에서 쓰러지는 노인들이 잇따라 발생한다. 지난달 충북 청주에서 폐지를 줍던 70대 할머니가 열사병으로 도로에 쓰러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같은 달 울산에서는 36도가 넘는 무더위에 폐지를 줍다 쓰러진 70대 할아버지가 "폐지가 담긴 리어카를 두고 병원에 갈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텨 결국 구급대원이 병원까지 직접 리어카를 끌고 간 사연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들 노인을 위협하는 건 날씨 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노인이 차도 위에서 보행해 사고 위험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서로 경쟁적으로 폐지를 줍느라 야간이나 새벽까지 활동하는 탓에 교통사고로 숨지거나 다치는 경우가 빈번하다.

 최근 서울 구로구 개봉동의 한 교차로에서 폐지가 든 리어카를 끌고 무단횡단 하던 77세 할머니가 버스에 치여 숨지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지난 14일 오후 10시. 서울대입구역 사거리 차도에서 리어카를 끄는 이정태(71) 할아버지의 모습도 위태로워 보였다. 어두컴컴한 화물차와 버스 등 대형차가 이 할아버지의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 할아버지는 갓길로 다니면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에 "인도는 사람들도 많고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기가 힘들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작년에 갓길에서 폐지를 줍다 택시랑 부딪혔어. 팔에 실금만 조금 가서 천만다행이었지. 근데 연초에 옆 동네에서 폐지 줍던 할머니가 트럭에 치여 반신 불구가 됐다는데 그런 얘기 들으면 겁나긴 해"라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뉴시스】 이재은 기자 = 지난 14일 저녁 서울대입구역 사거리의 차도에서 리어카를 끄는 이정태(71)할아버지 옆으로 화물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일선 경찰 관계자는 "노인이 폐지를 줍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건이 매달 한 건 이상은 발생한다"며 "고령자이기 때문에 사고가 나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65세 이상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는 2011년 3094건에서 2015년에는 6199건으로 두 배나 증가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사망자는 2012년 512명, 2015년 507명 등 연간 500명을 웃돌고 있다.  

 일부 경찰과 지방차체단체는 안전 대책으로 폐지 줍는 노인에게 야광 조끼와 리어카용 반사경 등을 보급하고 연간 두차례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또 이들을 폭염취약계층으로 분류해 얼음 조끼와 쿨스카프형 타월을 지원했다.

 그러나 실제 이를 착용하는 노인들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영광 전국고물상협회 사무총장은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야광 조끼 등 안전용품 개수가 턱없이 모자랄 뿐더러 덥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착용하지 않는 노인들도 많다"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다수인만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총장은 "정부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 보호에 적극 나서야 한다"면서 "특히 지자체는 폐지 수거 노인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철저히 한 뒤 안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lje@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