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수천년 미스터리, 한국 학자가 풀었다···‘서주사 절대기년’

기사등록 2017/06/23 11:32:35
【서울=뉴시스】 서주 12왕년의 정확한 절대연대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중국이 2000년 동안 매달려 온 학술 현안을 한국의 학자가 해결했다. 갑골문자의 왕국 은나라를 멸망시킨 서주(西周)의 12왕 연대의 수수께끼에 정답을 제시했다.

상주사(商周史)·고문자 전문가인 박대종 소장(대종언어연구소)이 중문 간자체본 ‘서주사의 절대기년(西周史之绝对纪年)’을 통해 서주사의 비밀을 밝혔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천자국 은나라를 밀어내고 제후의 나라를 천자국으로 승격시킨 서주의 시조는 무왕(武王)이다. 중국의 제1 출국금지 국보급 문물인 ‘대우정(大盂鼎)’ 명문은 ‘무왕은 문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세웠다(武王嗣文王乍邦)’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역사는 서주의 1대 왕을 무왕, 마지막 12대 왕을 유왕(幽王)으로 본다.

문제는, 서주사의 11대 선왕(宣王)과 12대 유왕을 제외한 이전 1대 무왕부터 10대 려왕(厲王)까지 정확한 재위연대가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다. 사마천이 중국 제1위 정사서 ‘사기(史記)’에서 11대 선왕 이전 ‘공화(共和)’의 섭정원년인 BC841까지만 구체적으로 명기했기 때문이다. 국제학술계가 중국사 연대를 BC841 이후부터 공인하고 있는 이유다.

서주사는 가공이 아니다. 실재한 역사인데 1~10대 왕년을 모른다. 중국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사적 난제에 처음 도전한 이는 중국 한나라의 역법학자 류흠(劉歆·?~23)이다.

서주 왕실은 은나라에서는 쓰지 않는 독특한 날짜 용어들을 사용했다. ‘생백(生霸)’, ‘사백(死霸)’ 따위다. 후한의 허신(許愼·58~149)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들 용어의 개념을 180도 바꿔 설명해 놓는 바람에 일이 크게 꼬였다.  2000년 전 류흠은 ‘사백은 朔(초하루 삭)이고 생백은 望(보름 망·15일)’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후대에 허신이 ‘생백은 월 중에서 2일 혹은 3일(霸·月始生魄然也 承大月二日 承小月三日)’이라고 잘못 해석한 탓에 숱한 학자들이 미로를 헤매게 됐다.

당나라로 접어들어 학승 일행(一行·683~727)은 ‘대연력(大衍曆)’을 지어 류흠 저 ‘삼통력(三統曆)’의 일부 오류를 규명했다. 그 뒤 송나라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보급 서주 왕실 청동기가 대거 발굴됐다. 이 청동기들에는 ‘생백’과 ‘사백’이 포함된 서주 당시 날짜를 나타내는 독특한 월상 용어 4개가 새겨져 있어 서주사를 밝히려는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청나라 말기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된 후 라진옥(羅振玉), 동작빈(董作賓), 곽말약(郭沫若)과 함께 ‘갑골 4당’으로 불리는 중국학자 왕국유(王國維·1877~1927)는 사서삼경과 같은 여러 고문서에 등장하는 ‘방사백(旁死霸)’, ‘방생백(旁生霸)’, ‘기방사백(既旁死霸)’ 등의 용어가 청동기 상에 나오지 않는다며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했다. 오직 4단어만 서주 때 월상용어로 쓰였다면서 한 달을 넷으로 나눈 ‘4분1월(四分一月)’설을 주장했다.

①초길(初吉·1~7·8일) ②기생백(既生霸·8·9~14·15일) ③기망(既望·15·16~23일) ④기사백(既死霸·23~그믐날)

동작빈이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지만, 왕국유의 학설은 오랫동안 중국학계의 주류이론으로 인식돼 왔다. 미국의 중국학술계는 이를 표준으로 받아들여 서주사의 왕년을 연구했다. 데이비드 S 니비슨, 데이비드 W 판케니어, 에드워드 L 쇼네시가 대표적 학자들이다.

중국 정부는 수천년에 걸친 이 학술난제를 해결하고자 1996~2000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했다. 이 과정에서 리학근(李學勤)을 필두로 한 중국학자 수백명이 왕국유의 4분1월설로는 답이 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서주 청동기들에 나오는 4개 음력 월상용어의 정의를 바꿔버렸다.

①초길 1~10일 ②기생백 1~15일 ③기망 16~23일 ④기사백 16~그믐

네 용어는 본래 한 달 중 각각 어느 하루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범위를 크게 늘이고 용어는 잘못 해석한 셈이다. 2000년 리학근 등은 임의의 기준으로 대표 청동기 명문 60여개의 날짜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서주 12왕의 왕년에 대해 발표했다.

1대 무왕(武王) BC1046~1043, 2대 성왕(成王) BC1042~1021, 3대 강왕(康王) BC1020~996, 4대 소왕(昭王) BC995~977, 5대 목왕(穆王) BC976~922, 6대 공왕(共王) BC922~900, 7대 의왕(懿王) BC899~892, 8대 효왕(孝王) BC892~886, 9대 이왕(夷王) BC885~878, 10대 려왕(厲王) BC877~841,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서울=뉴시스】 서주사지 절대기년
그러자 니비슨 교수와 쇼네시 교수는 물론, 중국에서도 학자들이 반발했다. 세계적으로 부정적 여론이 들끓었다. 이후 하상주단대공정에 참여한 학자들을 숙연케 만든 주공묘 서주갑골문,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준궤(畯簋) 명문 같은 새로운 증거유물이 속속 발견됐다.

2009년 3월14일, 주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의 묘에서 발굴된 서주갑골문 관련 좌담회가 베이징대학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풍시(馮時)는 “이번에 ‘방생백(旁生霸)’이 새로 발견됐다. 이것은 출토문헌 중 새로 보이는 월상명이다”, 리령(李零)은 “주공묘 갑골을 통해 역사문헌들에서 말하는 월상기일법이 실증됐다”고 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의 수석과학자이자 최고책임자인 리학근은 “여기에서 출토된 월상 단어는 기타 출토문헌과 마찬가지로 어느 고정된 하루를 나타낸다”고 운을 뗀 다음 “다만 서주 후기로 오면서 고정되지 않은 날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변형됐는데 이는 연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짚었다.

하상주단대공정 책임자들의 공개발언은 결국 서주에서 사용된 월상 단어들이 ‘초길, 기생백, 기망, 기사백’ 넷만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기준으로 결론 지어진 하상주단대공정 중의 서주 연대는 오류여서 전면 재검토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중국 정부 차원의 고백이다.

잘못된 것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건만, 중국정부 차원의 수정된 결론은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소장의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从五星聚房與帝辛占星陶文看武王克商日, 公元前1018年2月22日)’ 논문이 2014년 국제학술지 ‘은도학간(殷都學刊)’에 수위로 게재되며 주목받았다. 천문학과 출토문헌 등을 통해 서주사의 시작점, 곧 무왕의 건국원년이 BC1028임을 밝혀 천년의 학술현안에 기준점을 제시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논문이다. 중국고교계열(中国高校系列) 전문학술지 ‘구역문화연구’ 2014년 3기에도 실렸다. 중국학계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서주사의 절대기년’은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의 후속편이다. 박 소장은 서주의 월상 명사 가운데 핵심어인 ‘霸(백)’에서 月(달 월)을 뺀 䨣(격)자를 “雨(비 우)와 革(가죽 혁)자로 이뤄져 ‘변형’을 뜻한다. 비에 가죽제품이 젖으면 가죽은 쉽게 변형되기 때문이다”로 최초로 정해했다. 이를 근간으로 서주의 여러 월상 명사의 고정 날짜를 복원했다. 나아가 고서들에 기록된 천문현상과 청동기들에 기록된 날짜들을 재해석, 서주 12왕년의 정확한 절대연대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1대 무왕(武王) BC1028~1012, 2대 성왕(成王) BC1011~985, 3대 강왕(康王) BC984~971, 4대 소왕(昭王) BC970~951, 5대 목왕(穆王) BC950~926, 6대 공왕(共王) BC925~903, 7대 의왕(懿王) BC902~893, 8대 효왕(孝王) BC892~887, 9대 이왕(夷王) BC886~879, 10대 려왕(厲王) BC878~842,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천자국 서주의 기점은 무왕 원년인 BC1028, 종점은 유왕 말년인 BC771으로 간격은 257년이 된다. 제2대 성왕 원년 BC1011과 제3대 강왕 말년 BC971의 간격은 40년, 제1대 무왕 원년 BC1028과 제5대 목왕 말년 BC926의 사이는 102년이다. 이 연대는 중국 서주사와 관련해 가장 신뢰받는 고서인 고본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 “自武王至幽王二百五十七年”, “成 康之際 天下安寧 刑措四十年不用”, “自周受命至穆王百年 非穆王壽百歲也”와 서로 일치한다. 제10대 려왕 재위 37년(BC878~842)은 사기 주본기의 기록 “三十四年 王益嚴…三年 厲王出奔於彘”와 서로 완전 일치한다.

박 소장은 또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 1대왕 백금(伯禽)의 원년은 주나라 성왕 원년과 같은 BC1011년, ‘대우정’은 즉위년을 기준으로 목왕 23년(BC929)에 제작된 것 등을 밝혔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다룬 서주금문역보(西周金文曆譜)의 66개 문헌 혹은 기명 전체에 대한 날짜는 물론, 그 후 발굴된 신자료들의 정확한 연월일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박대종 소장은 “서주사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야 그와 연관된 기자조선 연대도 정확히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단군조선의 개국연도 또한 모호함을 벗고 밝혀지게 될 것이니 이 연구결과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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