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종자 되거라, 명문 ‘성산이씨 응와 이원조의 가족이야기’
【서울=뉴시스】북비 현판, 20세기. 북비(北扉)는 북쪽으로 낸 사립문으로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석문을 가리킨다. 그는 노론의 인사들이 집 앞을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남쪽 문을 뜯어서 북쪽으로 옮겼으며, 이 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다. 성산이씨 응와종택 소장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성산이씨 응와 이원조의 가족 이야기’가 16일 국립민속박물관 상설3전시관 가족 코너에서 막을 올렸다. ‘대대로 책 읽는 씨앗이 되어라’는 유훈을 전하는 4대에 걸친 자료 220여점을 소개한다.
응와 이원조(1792~1871)를 중심으로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과 가학의 전승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하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안은 조선 전기에 이우가 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에 처음 들어온 이래로 현재까지 성산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개마을은 영남에서는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이어 세 번째로 민속마을(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됐다.
【서울=뉴시스】독서종자실 현판, 20세기.이원조가 할아버지 이민겸의 자녀 교육과 가학을 기념하고 자손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대하며 북비채 대청 중앙에 건 편액. 소눌(小訥) 조석신이 썼다. 성산이씨 응와종택 소장. “아, 사람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계승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비로소 ‘종자(種子)’라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서책에서 옛 도를 찾아 참으로 ‘독서(讀書)’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이에 기록하여 후손들을 기다린다.”(독서종자실기, 응와선생문집)
이 마을을 빛나게 한 인물은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인 북비(北扉) 이석문(1713~1773)이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해 고향 성주로 낙향했다. 무괴심(無愧心), 즉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 세 글자로 자신을 다스린 그는 노론 인사들이 집 앞을 지나자 남쪽으로 나있던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그 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를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부터 북비는 이석문의 충절과 지조를 상징했다. 이와 관련된 ‘북비 현판‘과 함께 고종이 이석문을 추증하면서 내린 ‘추증교지’와 ‘치제문(致祭文)’이 전시된다.
한개마을 성산이씨 집안은 이석문 이후 응와 이원조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두 아들이 양자로 나가고 양자로 들어와 두 집의 가계를 계승했다. 이원조도 큰 집의 대를 잇기 위해 이규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러한 관계에서 할아버지 이민겸(1736~1807)의 엄격한 자손 교육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스승과 제자가 돼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아버지 이규진(1763~1822)에 이어 이원조도 과거에 급제했다. 할아버지가 밤낮으로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회초리를 칠 때 올려 세운 목침(警枕) 덕이며, 대대로 책 읽는 씨앗이 되라는 ‘독서종자(讀書種子)’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다. ‘사미당(四美堂)’ 이민겸, ‘농서(農棲)’ 이규진), ‘응와(凝窩)’ 이원조의 당호(堂號) 현판과 아울러 이규진의 장원급제 ‘홍패’ 등을 볼 수 있다.
【서울=뉴시스】응와선생영정,1865. 이원조가 74세에 기로사에 들어갔을 때 창경궁 영수각에서 도화서의 화공이 그린 초상화다. 기로사는 60세가 넘은 임금과 70세가 넘은 2품 이상의 관리가 들어가는 곳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성산이씨 응와종택 기탁)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18세로 문과에 급제해 공조 판서 등의 내직과 제주 목사 등 외직을 두루 거쳤다. 만년에는 주로 가야산 만귀정에 머무르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74세 때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영정(影幀)을 하사받았고, 1869년(고종 6)에는 과거에 급제한 후 6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해 회방홍패(回榜紅牌)를 받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자손들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허목(1595~1682) 등 명필가의 글씨를 탁본하거나 진나라 이사(?~BC208) 등의 글씨를 수집하기도 하고 주자의 ‘무이지(武夷誌)’와 같이 가야산의 만귀정을 중심으로 한 ‘포천도지(布川圖誌)’를 편찬했다. 또 이황이 아들에게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써준 것처럼 ‘시아첩(視兒帖)’과 침병(寢屛) 등을 만들어 자자손손 전승되는 응와종택의 가법으로 삼게 했다.
【서울=뉴시스】호우만고(毫宇漫稿)와 책갑, 19세기. 이원조가 79세 이후 지은 시문을 만귀정에서 제자들과 함께 연도별로 필사한 초고본으로 54권 27책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성산이씨 응와종택 기탁)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아들과 손자들은 가족 간의 교육을 통해 집안 대대로의 학문(家學)을 전승해 당대에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생가 조카인 이진상(1818~1886)과 종손자인 이승희(1847~1916)는 ‘한주학파(寒洲學派)’라는 당대의 일가를 이뤘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 ‘무괴심’과 ‘독서종자’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대대로 실천한 성산이씨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가족을 있게 해준 조상을 생각해보면서 가족 간의 소중한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뉴시스】침병,1862. 이원조가 71세인 1862년(철종 13)에 자신을 수양하고 경계하는 글로 만든 병풍이다. ‘함양성찰(涵養省察)’, ‘치지거경(致知居敬)’, ‘신사명변(愼思明辨)’ 등의 글자와 거가(居家), 독서(讀書) 등의 ‘진수팔잠(進修八箴)’이 기록돼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성산이씨 응와종택 기탁)
국립민속박물관과 한국국학진흥원이 주최하는 ‘성산이씨 응와 이원조의 가족 이야기’는 내년 4월3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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