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구당&회양당'···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장처 논란 '가열'

기사등록 2017/02/26 13:02:38 최종수정 2017/02/27 08:26:03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지난 23일 안동시청 브리핑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성 이씨 회양당 후손인 이선씨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초로 편찬된 '여자소학'을 소개하고 있다. 2017.02.26  kjh9326@newsis.com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원소장처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제70호)을 원래 소장하고 있던 집안이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이냐, 아니면 진성이씨 회양당(晦養堂)이냐'라는 문제다.

 두 집안은 모두 경북 안동시에 있다. 긍구당은 와룡면 가야리, 회양당은 와룡면 주하리다.

 해례본 원소장처 논란은 간송 전형필에게 이를 양도한 이용준(회양당 이한걸의 3남·긍구당 사위)이 사망(2004년)한 이듬해부터 박영진 부산예술고 교사가 '원소장처는 광산 김씨 긍구당'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안동시가 지난달 24일 주최한 '훈민정음 해례본 복각 전시 및 학술대회'에서 박 교사가 또다시 '긍구당 훈민정음과 그 이야기'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확산되는 양상이다.

 박 교사는 이 학술대회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회양당 고택의 세전가보(世傳家寶)가 아니라 긍구당 종택의 소장본을 사위 이용준이 훔친 것"이라며 "출처를 숨기기 위해 긍구당 장서인(藏書印)이 찍힌 표지를 찢고 간송 전형필에게 팔았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진성 이씨 대종회(회장 이경락) 측은 지난 23일 안동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 교사의 주장은 진성 이씨 가문의 명예와 자부심을 훼손시켰을 뿐만 아니라 간송미술관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며 반발했다.

 또 그 반박 자료로 1927년 회양당 고택 5형제가 합심해 편찬한 '여자소학(女子小學)'이란 책자를 제시했다.

 대종회 측은 "해례본은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 원소장자에 의해 이미 한글교육용 교재로 사용됐다"고 전제한 뒤 "이용준은 18세 무렵인 1933년 긍구당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해례본에 기초한 여자소학은 그보다 6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는 이용준이 장가들기 전부터 회양당에서 해례본을 보관·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또 '긍구당 장서인을 없애기 위해 표지를 없앴다'는 박 교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연산군 정책 때문에 부득이 찢어냈다"고 하면서도 "지난해 11월 열린 문화재청 자문회의 결과 '의도적 훼손이 아니라 2장이 없는 채로 오랜 기간 전래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과를 도출했다"고 반박했다.

 대종회 측은 문화재청이 1962년 12월20일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로 결정하면서 밝힌 발굴 과정과 구입 과정도 소개했다.

 1940년까지 이한걸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정(李禎)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며 "발견 당시 앞부분 두 장이 낙장돼 있던 것을 이용준이 글씨로 보완했다"고 했다.

 박 교사는 이에 대해 지난 24일 또다시 각 언론사에 진성 이씨 대종회측 주장에 대한 반박 자료 및 자신의 주장을 담은 해명서를 보냈다.

 해명서를 통해 박 교사는 "퇴계 이황 선생이 증조부 이정에 대해 쓴 '증조고비묘갈지'에 최윤덕 장군의 북정(北征)에 따라가 군공으로 관작을 받은 사실은 기록했지만 내사본(內賜本)을 받은 것과 원종공신에 책록된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성 이씨 족보와 '증조병조참의공사적'에는 이정이 세조 때 원종공신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며 "따라서 세종임금 때 (훈민정음 해례본을 여진정벌 공로로)하사받았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연산군의 언문 탄압 때 앞 2장을 찢어버렸다는 주장과 관련, "훈민정음 앞 2장은 세종의 어제(御製) 서문이 있고, 정음의 발음 풀이 몇 자 외에는 모두가 한자(漢字)로 쓰여 있다"며 "따라서 언문 탄압에 한자가 쓰인 책장을 뜯었다는 말도 모순이다"라고 강조했다.

 또 "김주원 교수에 따르면 훈민정음 뒷면 글씨는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이며, 18세기 서체라 연산군 때 찢은 것도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이용준이 서책을 유출하는 시기인 1939년과 1940년, 1941년에 장인 김응수에게 보낸 편지 12통(현재 긍구당에 보관)을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처가 긍구당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했다.

 박 교사는 "편지 내용에 이용준은 서책을 가지고 온 일에 대해 '범행자부대죄(犯行自負大罪)'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범행이 대죄이며, 저지른 행위는 범죄였음을 시인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책을 가져간 일에 대해 '고속이서지례(古俗貽書之例-옛 풍속에 책을 주는 사례)'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에게 책을 그냥 준 것인 양하라는 말을 쓰고 있다"며 '긍구당이 원소장처'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은 진성 이씨 회양당 출신으로 광산 김씨 긍구당의 사위인 이용준이 1939년 간송 전형필(간송미술관 설립자)에게 거금(당시 1만원, 현 시세로 기와집 10채 가격)을 받고 넘긴 것으로 전해진다.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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