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애락을 함께해 오다, 긴 잠에 들어갔던 대구 달성토성이 새롭게 단장되면서 시민들의 곁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달성토성의 역사는 1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 신라의 부족 국가 중 하나였던 달구벌의 성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내용에 '108년 신라가 다벌국을 병합한 뒤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 달구화현으로 불리던 달성은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현재 ‘대구’라는 이름의 시초가 됐다.
신라시대 영광을 누리던 달성 토성에는 달성 서씨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보여주는 서침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달성 토성은 고려 중기부터 달성 서씨의 세거지 였는데 조선 세종 때 달성이 나라의 요새로 쓰이게 되자 서씨 집안은 흔쾌히 토성 땅을 내놓았다.
소식을 들은 세종이 이를 포상하려 하자 서침은 그 대신 백성들에게 거두는 환곡을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세종은 이를 기특히 여겨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을 기리게 했는데 이것이 현재 달성공원 내에 있는 서침나무다.
이후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달성토성은 대구 근·현대사에서 우울한 나날을 맞이했다. 일제에 의해 일본식 신사가 지어지고 공원으로 변해버린 달성토성 일대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판자촌을 이루고 산업화의 수혜도 비껴간 지역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다.
서구는 지난 1월 총 8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대구시 서구 비산 2·3동의 서편 200m 구간에 식생을 정비하고 주변 경관을 저해하던 콘크리트 담장을 허물고 잔디를 심어 달성토성의 본 모습을 되찾는 토성경관 정비사업을 완료했다.
또 마음씨 고운 과부 한사람이 가난한 형편에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물을 길러 갔다가 두레박에 청어가 올라와 귀한 손님을 대접했다는 전설인 청어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벽화 등 현재까지 총 10여 곳에 벽화가 수놓아져 있다.
벽화 골목 옆에는 ‘달성공원 키다리아저씨’로 알려진 류기성씨의 철제 입간판이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1968년 대구백화점 개업당시 홍보인으로 스카웃 된 류씨는 225㎝의 큰 키로 1971년부터 27년 동안 달성공원 문지기로 근무하던 공원을 대표하는 추억속의 인물이다.
달성토성마을에는 류씨의 입간판 뿐만 아니라 달성토성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골목정원 지도와 다양한 조형물들로 꾸며져 있다.
서구청는 청어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을 추진 하는 한편, 날뫼골 일대를 정비해 과거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달성토성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달구벌국, 그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스마트 폰 앱을 실행한 상태로 달성토성 등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보물찾기를 하는 체험 콘텐츠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대구시의 역사문화콘텐츠 공모사업에 신청한 상태다.
마을주민과 서구청의 노력으로 이곳은 입소문을 타 방문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쌀쌀한 평일에도 남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박현정(21)씨는 “어릴 적부터 알던 곳이었는데 오랜만에 들러보니 정말 많이 변해있어 놀랐다”면서 “잠깐 둘러보고 가려했지만 마을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한참 돌아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달성토성마을 주민 김수목(72)씨는 “몇 년 전부터 마을주민들과 구청 직원들이 함께 마을을 꾸미고 있다”며 “마을 정비 당시 직접 참여해 많은 일을 했었는데 정비 후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많이 찾아와 동네가 밝아진 것을 보니 뿌듯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 지난해 6월에는 달성토성마을축제가 열려 5000여명의 방문객이 달성토성마을을 찾아 과거와 다른 달성토성의 모습을 즐겼다.
서구청 이동중 도시재생과장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달성토성 재생사업을 하면서 대구의 정체성을 되살리게 됐다”며 “달성토성과 대구의 3대 시장 중 하나인 서부시장과의 연계도 구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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