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여류예술가인 신사임당은 5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얼굴처럼 이미지가 박제됐던 것이 사실이다. 현모양처 또는 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등을 통해 조신한 모습이 주를 이뤘다. '사임당, 빛의 일기'를 비롯해 최근 신사임당을 톺아보는 흐름은 좀 더 역동적이고 입체적이다.
◇박제된 이미지 대신 현재 투영한 워킹맘
200억원을 투입해 2년의 제작 기간을 거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특히 워킹맘으로서 신사임당을 살핀다. 신사임당의 삶이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기록 등을 살펴보면 율곡 이이의 아버지이자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심성은 착했으나 가장으로서는 제 역을 못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사임당, 빛의 일기'의 박은령 작가는 "기록을 보면 이원수가 기생과 딴 집 살림을 차리는 등 사임당 속을 꽤나 썩였다"고 말했다.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하며 말썽쟁이 남편을 두고 아이를 어렵게 키워간 인물이 사임당이라는 얘기다.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신사임당을 연기하는 이영애는 24일 제작발표회에서 "저도 워킹맘이지만 과거의 사임당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임당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정말 현모양처이기만 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역할이 시작됐다. 강하고, 살림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아버지로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고 덧붙였다.
◇출판·전시계도 사임당 열풍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의 '사임당전'(민음사)이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임용됐고 규장각 관장을 지낸 정 교수가 후세에 의해 덧씌워진 사임당에 대한 여러 이미지를 걷어내고, 실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신사임당을 소재로 한 소설도 연일 쏟아지고 있다. 작가 이순원이 숙종의 시, 소세양의 '양곡문집', 어숙권의 '패권잡기' 등을 바탕으로 현명한 여인이자 주체적인 여성으로 사임당을 다룬 '정본소설 사임당'(노란잠수함), 작가 주원규가 천재 여성화가 사임당의 일대기에 주목한 소설 '사임당, 그리움을 그리다'(인문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앞서 작가 권지예의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자음과모음)는 '위대한 어머니의 표상'이라는 견고한 이미지에 줄곧 갇혀 있었던 사임당이 끼와 욕망을 억누르며 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어두운 삶의 그림자를 펼쳐 보이며 주목 받기도 했다.
이밖에 웹소설, 어린이을 위한 위인전, 컬러링북 등 장르가 다양하다.
신사임당이 유명한 여류 화가였던 만큼 관련 미술 전시도 준비됐다.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24일 '사임당, 그녀의 화원'을 개막했다. 신사임당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草蟲圖)' 등 14점을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의 남겨진 그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당대 주목 받던 화가로 산수화로도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사임당 열풍 지금 왜?
사전 제작 드라마로, 중국 동시 방송을 기다리다가 편성이 늦어졌지만 지난해부터 문화계 중심으로 들어온 페미니즘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제작진 역시 단순한 '히스토리'가 아닌 여성을 강조한 '허스토리(Herstory)'를 내세웠다.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전'에서 "사임당이 현모양처였느냐, 훌륭한 예술가였느냐 하는 이분법적 논의가 '사임당의 예술적 성취와 자아실현이 현모양처 역할에 누가 됐는가? 과연 모성과 여성 주체성은 상호 갈등 관계인가?'라는 명제와 관련돼 있다"고 썼다.
이영애는 "딱딱한 사임당의 모습 대신 예민하기도 하고 예술적인 면모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조신하고 단아한 모습뿐 아니라 이면에는 불 같고 에너지가 많은 '다이내믹한 사임당'은 어떨까 연기자 입장에서 그렇게 봤다"고 말했다.
'여성혐오' 등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시대에 살림과 자녀 양육은 물론 자신의 업에서도 성과를 낸 신사임당은 하나의 롤모델로서 대중의 바람을 투영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박은령 작가는 신사임당이 사실 능동적인 여성이라고 봤다. "사임당의 아버지 유언이 '삶을 선택하라'였다. 사임당은 그래서 매우 능동적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하면서 살아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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