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추진해온 개헌안이 4일(현지시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그에 따른 정치적 후폭풍 뿐 아니라 경제적 충격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결정에 이어 이탈리아의 개헌안 국민투표 부결이 유럽경제에 설상가상의 충격을 더하고 있다. 브렉시트에 이어 ‘이탈렉시트(Italexit, 이탈리아의 EU 탈퇴)’까지 발생할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4일(현지시간)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기 짝이 없던 이탈리아 은행들이 이탈리아의 정치 및 경제의 혼돈과 함께 대거 도산위기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의 금융위기가 현실화 할 경우 유럽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 까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FT는 이날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우려를 해야 하는 곳은 이탈리아 은행들이다. 이번 개헌안 국민투표 결과는 ‘몬테 데이 파스키 데 시에나’ 은행의 존립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탈리아 3위 은행인 몬테 데이 파스키 은행은 부실이 가장 심한 은행”이라고 전했다.
FT는 개헌안 국민투표 직후 몬테 데이 파스키 은행이 50억 유로(약 6조2000억 원) 규모의 유상 증자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렌치 총리의 사임으로 이런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1700억 유로(약 211조원) 규모의 은행채권을 소유하고 있다. 만일 어떤 한 은행이라도 도산을 하게 될 경우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은행들마저도 연쇄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FT는 최대 8개 이탈리아 은행이 도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구제 금융에 나설 경우 이탈리아 정부부채가 늘어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탈리아 정부의 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133%를 넘어선 상황이다.
WSJ는 이번 개헌안 부결 이후 투자자들은 이탈리아의 정정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의 정치 관측통들은 이번 개헌안 부결의 가장 큰 이유로 기득권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을 들고 있다. 투자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기성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자칫 반(反) 유로 정서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렌치 총리의 사임으로 ‘이탈렉시트(Italexit)’ 움직임도 구체화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유로존 탈퇴와 리라화 복귀, 이탈렉시트를 목표로 내걸고 있는 포퓰리즘 성향의 ‘오성운동’은 지난 2009년 창당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이탈리아 국민총생산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보다 낮은 상태에서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35%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0년 전인 1997년과 비슷한 3만3000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탈리아의 이 같은 경기침체는 은행 부실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불황으로 도산하는 기업과 개인 신용불량자들의 빚은 고스란히 은행 부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은행권의 부실여신은 3600억 유로(약 461조5200억원)에 달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2014년 6월 마이너스 금리(-0.10%)를 도입했다. 시들시들 힘을 잃어가는 유럽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고강도 처방이었다. 그러나 마이너스 금리는 이자를 먹고 사는 은행들의 입장에서는 나쁜 소식이었다. ECB의 금리 인하는 단기적으로는 이탈리아 은행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최근 10년 만기 이탈리아 국채와 독일 국채 간 이자율 격차는 지난 2014년 이후 가장 큰 폭을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증시는 유럽시장에서 가장 지지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런 와중에도 비교적 경제를 안정되게 이끌어온 렌치 총리의 사임은 이탈리아 은행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길 우려가 높다.
역대 이탈리아 총리 중 최연소 였던 렌치(41)는 지난 2014년 취임과 함께 야심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해 왔다. 렌치 총리는 현대적인 경제구조를 마련하고 청년 실업을 비롯한 실업 문제 해소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신규고용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개헌안 부결 이후 처음 열리는 5일 유럽증시 개장을 긴장감 속에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 금융당국이 가장 우려하는 사태는 대형 '뱅크런'(은행 예금을 한꺼번에 인출해 은행이 순식간에 도산하는 상황)이다. 그럴 경우 이탈리아 은행권 뿐 아니라 유럽 금융권 전체를 흔드는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그동안 뱅크런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구제금융을 투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은행 지분을 취득하거나 신규 공채를 발행하는 형식이다. 부실은행구제기금인 '아틀란테'(Atlante)를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가 구제금융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EU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EU는 지난 2014년 구제금융 반대 규정을 도입했다. 기업의 부실을 풀기 위한 구제자금은 납세자가 아닌 채권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EU와 독일은 이탈리아 정부에게 EU 규정을 어기지 말라는 경고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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