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30일 오전 11시 경주시 인왕동 387-1번지 일대에서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발굴조사’ 성과 현장을 공개했다. 20만7000㎡에 달하는 경주 월성은 편의상 서편부터 A―D지구 등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발굴조사 중이다. 2014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C지구 시굴조사를 했고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A지구와 C지구, 해자지구를 발굴조사 중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심영섭 소장은 “신라사 연구의 핵심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3월부터 시행한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 결과,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일곽의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군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자료에 의하면 월성에는 주로 4세기에서 9세기까지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들어섰으며, 신라 멸망 이후 근대 이전까지는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월성 발굴조사는 20~30년간 이어질 장기 프로젝트다. 이날 현장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현장설명회도 진행됐다. 하지만 이곳이 월성인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심 소장은 “일부 시민만 이곳이 월성인지 알고 있다. 올해는 성벽이나 해자 등 외연을 정리해 누구나 월성을 인지하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에 따르면 월성은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 22년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과 같은 까닭에 이름으로 삼았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3023척(약 916m)이다. 실제로 측정된 둘레는 약 2400m로 기록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는 기록의 오류로 추정된다.
◇C지구, 토제 벼루 50점 출토…문서 작성 공간 추정
이번에 건물지군이 확인된 곳은 석빙고가 있는 월성의 중앙지역인 C지구다. 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일곽의 건물지군은 동서 51m, 남북 50.7m의 정사각형 모양이며 담장을 둘러친 일곽 안팎에 총 14기의 건물이 배치된 형태로 나타났다. 건물과 담장의 건축 시기는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이종훈 학예연구관은 “인화문(도장무늬) 토기,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관련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돼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초기에는 담장 안팎에 길이 36m(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 등 6동의 건물을 배치했으나 이후 내부 공간 확보를 위해 좌우 경계인 동·서쪽 담장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하면서 모두 14동의 건물을 갖추어 왕궁 시설을 완성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괄 건물지군의 성격은 건물 유구들과 함께 확인된 생활유물 중 흙으로 만든 ‘토제 벼루’를 통해 확인됐다. 토제 벼루가 50점(편)이상 출토된 것은 이례적으로 이는 월성 주변의 동궁과 월지, 분황사 등에서 출토된 양보다 월등히 많다. 이종훈 학예연구관은 “벼루가 대량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일곽 건물지군에는 문서를 작성하는 중심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C지구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류 외에 명문이 있는 유물 등이 출토되고 있다. 지난해 공개한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 ‘습부(習部)’, ‘한지(漢只)’, ‘한(漢)’자명 유물 외에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이 새겨진 기와와 토기가 새롭게 출토됐다.
이 중 ‘전인(典人)’은 궁궐 부속관청인 와기전(기와·그릇 생산 담당)에 소속된 실무자, ‘본(本)’은 신라 정치체제인 6부 중 하나인 ‘본피부’,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C지구에서는 또 두 개의 통일신라 문화층과 5개의 신라 문화층이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지난해 하반기에 착수한 월성 서편 지역인 A지구의 성벽과 문지에 대한 조사는 현재 진행 중으로, 성벽의 축성과정과 문지의 흔적은 추후 밝혀질 예정이다. 지금까지의 조사 자료를 분석해보면 성벽의 마지막 보수 시점은 8세기 전후로 보인다.
성벽이 움푹 파인 듯이 끊기는 지점(추정 서문지 지점)에서 월성 안팎을 드나들던 조선시대 이후의 통행로 흔적이 발견됐다. 작은 자갈을 깔아 만든 약 3m 폭의 통행시설이다. 통행로에서 조선시대의 백자편과 옹기편이 출토됐다.
A지구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특수기와도 최초 출토됐다. 기와를 만드는 틀인 ‘와통’ 없이 점토 띠를 말아 감아서 만든 암키와의 옆면에 막새 드림새를 따로 만들어서 붙인 특이한 형태다. 암키와를 와통 없이 제작하는 방식은 6세기 전후 신라 초기 기와로 추정된다. 앞으로 서성벽 내 건물지 조사를 통해 특수 기와의 용도, 신라 초기의 기와 도입과정 등을 규명해 나갈 계획이다.
남천이 접한 남쪽 면을 제외한 동, 서, 북 3면에서 해자의 존재와 변천과정이 확인됐다. 해자의 형태는 수혈해자→석축해자(연못형 해자)로 변모했고, 해자의 기능이 상실된 뒤 해자를 매립하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경우도 있었다.
월성 동남 측의 가 구역(국립경주박물관 북편)을 포함해 서쪽방향으로 라 구역까지 총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조사했다. 그중 다 구역에서는 독립된 형태의 연못형 해자가 5기 확인됐다. 하부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수혈식 해자가 존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최문정 학예연구사는 “이른 시기는 3세기까지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해자의 기능이 축소됨에 따라 일부 해자 위에 건물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곳 해자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은 목간이다. 모두 130점이 출토됐으며 약재구입에 대한 내용, 습서, 왕경의 지명 등이 기입된 것이 나왔다.
한편 연구소는 신라 1000년 궁성의 체계적 복원을 위한 철저한 고증연구와 학술 발굴조사를 함과 동시에 정기적인 성과 공개, 대국민 현장설명회, 사진 공모전, 학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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