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는 젊음을 먹고 산다. 나이가 나이인만큼 한지일(68)은 잊혀진 영화배우일 수밖에 없다.
‘얼짱’, ‘몸짱’ 겸 ‘학사배우’(경희대 신문방송학)로 주목받은 톱스타다. 1969년 데뷔하면서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한소룡’(본명 한정환)으로 15년 간 활동하다 ‘한지일’로 개명했다. ‘길소뜸’에 출연하는 한소룡에게 이장호 감독이 “무술배우도 아니면서 한소룡이 뭐냐”고 한 것이 계기다. ‘길소뜸’에서 공연한 신성일의 ‘일’, 김지미의 ‘지’를 따와 한지일이 됐다.
한소룡 시절, 누드모델 제의도 받았다. 1979년 미국의 성인여성지 ‘플레이걸’이 태권도 3단의 탄탄한 한소룡을 벗겨 촬영하려 들었다. 한지일은 누드모델 경력이 있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거명하며 “그때 우리나라 사회분위기에서 플레이걸의 제의에 응했다면 연예계에서 바로 퇴출당했을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었다.
영화 70여 편에 출연했다. 1978년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고, 1979년 작 ‘물도리동’은 한지일에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1986년 시카고영화제에서 겟츠평화대상을 따낸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도 한지일은 열연했다.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수상작 ‘아다다’의 남자주인공이 한지일이다. 이듬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거머쥔 ‘아제아제바라아제’는 그에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선사했다.
40대 이하에게 한지일은 곧 ‘에로 비디오’계의 대부다. ‘젖소부인 바람났네’, ‘정사수표’, ‘마가씨’, ‘아줌마’ 등의 성인물 시리즈 제작자가 바로 한지일이다. 배우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한지일은 1990년대 말 IMF 사태의 여파로 100억원대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 동시에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성인용 비디오는 퇴물이 돼버렸다.
한지일은 20세기의 뉴스메이커였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부터 그는 허위는 아니어도 몹시 과장된 홍보로 이목을 끌었다. 보도내용을 보면 경찰이나 검찰이 개입할 법도 하건만, 대개 유야무야 없던 일이 돼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윈윈했다는 점도 절묘하다.
대중의 망각 대신 비난을 택해야 유명인이다. 욕 먹는 것이 무관심보다 낫다. 이런 유형의 셀러브리티인 한지일에게서 발견되는 뜻밖의 구석이 있다. 집착과도 같은 ‘봉사’ 활동이다.
8년 전 쫓기듯 미국행을 택한 뒤에도 한지일의 천성은 그대로다. 자동차 세일즈맨, 화장품 영업사원, 접시닦이, 15인승 밴 운전자, 농특산물 호객꾼, 보석 판매원, 정수기 판매원 등 21개 일자리를 전전하는 중이다. 땀 흘려 번 돈을 모아 복지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 초콜릿, 떡국, 김, 찜질기, 고추장, 된장, 빵, 과자, 미역, 다시마, 김 등을 선물하고 있다. 탈북어린이를 돕는 데 3000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사랑, 용서, 희망, 행복, 자살방지 등을 주제로 강연도 꾸준히 해왔다. 그렇게 11만㎞, 지구 두 바퀴 반 이상을 돌았다.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점으로 한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한지일이 5월 중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주 돌아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연예계 컴백인지, 또 무슨 착한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편집부국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