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한글, 세종대왕이 만든 것 아니다”

기사등록 2014/10/08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3:28:53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65>

 “신미(信眉·1403~1480) 대사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은 한글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 사적기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미(본명 김수성) 대사의 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등 각종 자료를 보면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산파 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것은 신미대사의 요청 때문이다. 집현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미 17년 전 ‘영산김씨 대동보’는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겼다.

 5년 전에는 신미가 ‘충북 역사·문화인물’로 선정됐다. “조선 세조~세종 조의 승려로 범어에 능통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담당”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9월30일, 작가 정찬주(61)가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발표했다. 당대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신미가 한글창제의 숨은 주역이라는 내용이다. 근거는 작년에 발견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다. 신미가 쓴 훈민정음 언해본인 ‘원각선종석보’는 1438년에 나왔다.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8년 전이다.

 세종은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존호를 신미에게 내리라고 유언했다.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우국이세의 실체, 바로 훈민정음 창제라고 작가는 지목한다.  

 세종 즉위 19년(1437) 초가을, 신미는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梵字)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연구한다. 이듬해 세종은 신미를 집현전 학사로 제수한다. 하지만 유신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신미는 집현전을 떠나 정음청(正音廳)이라는 임시 관청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이후 1438년, 우리 글자 28자가 완성되고 나서 처음으로 신미는 ‘원각선종석보’를 우리 글자로 언해하는 작업을 하고, 그해 ‘원각선종석보’ 언해본 다섯 권이 출간된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공개하기 5년 전이다.   

 신미 대사뿐 아니다. 난계(蘭溪) 박연(1378~1458)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단언한 연구서가 2년 전 출간됐다.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 박희민(67) 작 ‘박연과 훈민정음’이다. 세종 5년(1423) 3월23일 문헌 연구를 시작해 9년 6월23일 훈민정음을 창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21년 4월24일 훈민정음 창제를 완료했으며 25년(1443) 12월30일 훈민정음 창제를 공표했다는 일지까지 내놓는다. 

 저자는 ‘세종실록’의 기록과 ‘난계유고’의 상소문을 제시한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논리를 세종 26년 2월20일자 실록에서 찾아냈다. 첫째 운서를 아는 사람, 둘째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셋째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돼있다. 이 반박논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조건이 정확하게 표현돼 있다고 짚는다.

 ‘율려신서’와 ‘홍무정운’ 등 운서에 정통하고, 사성칠음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1번 소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면서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한 박연이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고 못박는다.

 특히 ‘난계유고’ 1번 소는 그간 박연을 위대한 음악가로만 본 탓에 ‘방음부정(方音不正)’이라는 어구를 ‘음악이 바르지 아니하여’로 해석했으나 조선 초에 음악은 악(樂)이라 했고 말은 음(音)이라 했기 때문에 ‘우리말이 바르지 아니하니’로 풀이해야 옳다는 지적이다. 이를 바로잡고자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을 강조하는데, 박연의 이 같은 논리가 세종의 언급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으므로 박연 주도, 세종 지원 하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다는 것이다. 박연이 훈민정음의 주자를 제작하고 세종에게 훈민정음을 교육했다는 정황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신미 또는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문화재청은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돼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했다는 해례를 비로소 알게 됐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립국어원은 “훈민정음은 크게 보면 예의(例義)와 해례(解例)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예의는 세종이 만들었고 해례는 8명의 신하들(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이 만들었다. 세종실록 권 113의 28년 9월조는 ‘어제왈(御製曰)’이라 하고 나서 예의 부분(세종의 서문·훈민정음의 음가 및 운용법에 대한 설명)을 기록하고 있어 세종이 그것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고 알려준다.

 온라인편집부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