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7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차일혁 경무관은 홍성공업전수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조선인 교사를 연행하던 일본 고등계 형사를 구타하고 17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조선의용대에서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치다가 광복 이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악명 높은 일본 형사 사이가, 미와, 츠보이 등을 저격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섰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0월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장(경감)에 투신해 지역 내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1951년 1월 남한 유일의 정읍칠보발전소 일대를 빨치산 2500여 명이 포위하자 75명의 소수 인원을 이끌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차 경감은 포위됐던 발전소 경비병력 350여명과 함께 50여 일 동안 신출귀몰한 전술을 구사해 빨치산을 물리치고 발전소를 탈환해 호남과 충남일대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1953년 9월 야간전투 때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총경)으로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교전 3시간 만에 붙잡아 토벌작전을 사실상 종료시켰다.
이외에도 차 경무관은 작전에서 주민의 거짓말로 적의 매복에 걸려 부대원 68명을 잃으면서도 주민에 대한 보복행위를 금지하는 등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냉철한 지휘관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195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특히 차 경무관은 빨치산 토벌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에 문짝만 태우는 등 필사적으로 대처해 화엄사를 비롯해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등 소중한 문화유산을 슬기롭게 지켜냈다.
"절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던 그의 말은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면서도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학식과 품성을 짐작케 한다.
2008년 10월 문화재청은 고찰을 구한 그의 공로에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고, 시인 고은도 공덕시를 지어 업적을 기린 바 있다. 화엄사 경내에는 차 경감을 기리는 공적비가 건립돼 있다.
1954년 전투경찰에서 물러나 충주, 진해, 공주 등지에서 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때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불우청소년들을 위해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해 인재를 배출했다. 작전성공으로 부대에 포상금이 내려지면 이를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 1958년 공주 금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오는 9월4일 오후 2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족과 경찰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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