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새벽(曉)은 서당화상(誓幢和尙) 원효(元曉)스님이 열고 한낮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만들고 조선시대 승군장(僧軍將)으로 이름을 떨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스님이 저녁노을이었다고 한다. 그럼 지금은 깜깜한 어둠 즉 무명(無明)이고 말법시대라는 말이 된다. 누가 다시 이 깜깜하고 칙칙하고 어두운 새벽을 밝혀 줄지는 알려주지 않아 불편하다.
우리가 원효성사라고 부르는 소성거사(小性居士)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이라고 하면 인도 룸비니처럼 부처님 탄생지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된다.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소성거사의 경지가 적어도 ‘화엄경’에서 말하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인 환희지(歡喜地)에 올랐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환희지는 보살이 부처의 이치를 깨달아 다시는 성인의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므로 기쁨이 많은 경지다.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소성거사는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이라는 팔만대장경에 들어가는 수많은 경전을 지은 것만 봐도 그 경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성거사는 15세경에 출가해 낭지(朗智)와 혜공(惠空) 보덕(普德) 등을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한 명의 스승을 모시지 않고 수도에 정진했다. 소성거사는 34세 때 의상(義湘)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의 길을 떠났다.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혼자 돌아왔다. 무소의 뿔처럼 오직 홀로 우뚝 서서 걸어가 부처님의 경지를 체득했다. 부처님조차도 부처님[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닌 그의 가르침인 정법[달]을 따르라고 했다. 이미 법의 등이 밝았으니 나의 등만 밝히면 된다[법등명자등명(法燈明自燈明)]. 스승을 교조화한 티베트 라마교나 선불교의 조사선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은사나 종단의 큰스님이 아닌 정법의 맞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르든가 아니면 그들조차도 버려도 충분히 보살이 될 수 있음을 소성거사가 일생을 통해 보여줬다.
소성거사는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이러한 형식상의 파계를 통해 그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재가자로 지냈다. “머리를 깎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기르면 소성거사로다. 몸은 몇 가지로 나투지만 손이 손등과 손바닥이 있는 것처럼 이 두 가지 모습을 한 것은 다만 한바탕의 유희로다!”라는 이규보의 시를 보면 된다. 사실 소성거사에게 승속의 차이가 어찌 있었겠는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영남학파의 종조인 김종직(金宗直)의 ‘영일현인빈당기’를 보면 “산속에 소성거사의 유적이 있었다”라고 했다. 유학자들도 인정한 소성거사는 ‘발심수행장’에서 “몸은 비록 산중에 있어도 마음이 번뇌와 집착에 매여 있으면 진정한 출가라 할 수 없고 반면에 몸은 비록 세속생활에 놓여 있지만, 마음에 번뇌와 집착이 없으면 출가한 사람과 다름이 없다”라며 스스로 재가자지만 출가한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소성거사는 광대처럼 표주박을 들고 춤추면서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무애가(無㝵歌)를 불렀다. 또 다른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는 얘기는 사료나 비석에는 남아있어도 다시 출가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가 부처님에 경지에 다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출가승려가 아니라 재가자 즉 문수보살까지 가르쳤던 유마거사와 같은 거사다.
소성거사는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서 백성들이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됐다. 실제로 아무리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만 해도 정토왕생은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또는 말해야 하는 의도는 있다. 하근기의 중생들이 죽는 순간에 맘 편하게 가야 49일의 길 즉 환생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윤회왕생을 돕고자 소성거사께서 보리심을 일으켜서 시킨 것이다. 정토는 사랑하는 당신, 가족, 도반이 함께할 수 있는 이곳일 뿐이다. 이곳이 정토여야 하며 그렇게 원하고 행하는 사람이 바로 보리심을 실천하는 당신 바로 보살임을 소성거사는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경주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던 소성거사가 686년 3월 30일 이름 없는 혈사(穴寺)라는 곳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한 이유는 뭘까? 이전에 신라왕이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모시고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를 열었을 때 사람들이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이 헐뜯어서 모시지 못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왕의 명령으로 소성거사가 ‘금강삼매경’을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하자,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에 소성거사는 “지난날 나라에서 100개의 지붕받침나무를 구할 때에는 낄 수도 없더니, 오늘 대들보를 구하는데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당시 고승들은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스님을 가르쳤지만, 일부 높은 스님에게 괄시를 받았고 이름 없는 절에서 돌아가신 소성거사는 부처님의 경지에 간 분이다. 앞으로 유마거사와 같은 소성거사라고 부르며 재가 불교의 종조(宗祖)로 모셔야 한다.
※칼럼니스트 하도겸은 불교 신자이며 법사로서 말법시대 불교계의 자성과 쇄신을 촉구하는 입장에서 칼럼을 쓰고 있다. 칼럼 대부분은 제보되거나 인터뷰한 분의 글을 수정·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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