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는 기존 지번을 대신해 도로명과 건물번호만으로 주소를 알기 쉽게 표기하는 제도다. 먼저 도로 이름을 정하고 도로에 따른 일련의 번호를 건물에 매기는 방식이다.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되기까지 준비 기간만 17년, 투입한 예산만 4000억원에 달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주소 체계로 연간 4조3000억원 이상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 방침은 도로명 주소를 사용할 때 따르는 불편을 줄여 제도를 조기에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새 주소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옛 주소를 병행해서 쓰는 등 여러 가지 허점도 드러내며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도로명 주소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이에 대해 잘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 불편만 커졌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도로명 주소가 제대로 정착됐는지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정착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택배 제대로 도착할까'… 설 대목 앞두고 택배업계 '비상'
설을 열흘 가량 앞두고 택배업체들이 눈코 뜰 새 없는 '배송전쟁'을 치르고 있다.
명절 선물이 폭증하는 가운데 올해부터 옛 주소를 대체한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 탓에 택배기사들은 2중고를 겪고 있다.
택배업체들은 혼란을 막기 위해 신·구 주소를 가리지 않고 병행 표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택배기사들에게 새 도로명 주소 체계를 교육했다.
그럼에도 낯선 도로명 주소는 지번 주소로 다시 바꾸는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는 배송 지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직접 물품을 나르는 택배 기사들에게 도로명 주소는 곤혹스럽기만 하다. 익숙하지 않은 새 주소보다 옛 주소방식을 더 선호한다는 게 택배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택배기사 김모(45)씨는 "익숙하지 않은 새 주소보다 옛 주소방식을 더 선호한다"며 "새 주소를 일일이 다시 확인하다보면 시간이 지체돼 고객들에게 항의 전화를 많이 받는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택배기사 서모(36)씨는 "스마트폰으로 새 주소를 검색해 예전 주소를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고객과 전화해 위치를 확인한다"며 "정부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불편하다"고 말했다.
일부 택배기사들은 옛 주소로 표기해야 배송하는 데 오히려 더 편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고객들조차 도로명 주소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옛 주소와 도로명 주소 병행 사용 '불가피'
공공기관은 아직까지 옛 주소를 병행 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해부터 전입이나 출생, 혼인 등 민원과 모든 공공기관 업무에서는 반드시 도로명 주소를 작성해야 한다. 또 새롭게 발급되는 주민등록증과 면허증에는 새 주소가 적혀 나온다.
하지만 토지대장 등 부동산 관련 민원은 지금처럼 지번주소를 써야 한다.
부동산은 토지와 건물로 나뉜다. 건축물은 도로 따라 번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도로나 연결된 길이 없는 땅인 이른바 '맹지'의 경우 사실상 번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찰과 소방당국 역시 도로명 주소와 지번주소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일선 경찰과 소방관들은 "혼선이나 큰 불편은 없지만 번거로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경찰청 관계자는 "도로명 주소뿐만 아니라 기존 지번주소나 건물명으로 신고해도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췄다"며 "직접 현장에 나가는 순찰차 네비게이션에도 자동으로 도로명과 지번, 건물 이름 등이 표시된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까지 시스템 오류나 문제는 없지만 번거로운 게 사실"이라며 "신고 장소를 제대로 찾지 못해 신고자와 몇 차례 통화한 끝에 찾은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새로 도입된 도로명 주소가 정부 등 공공기관만 사용하는 '공공기관 전용주소'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도로명 주소 정착하는데 최소 10년?
도로명 주소 도입은 20년 가까이 논의됐다.
지번주소는 1910년 일제가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 도입된 '수탈장치'의 하나로 쓰였다. 이 주소 체계는 이후 급격한 도시 개발로 토지가 분할·합병되면서 많은 문제를 낳았다.
정부는 100여년간 사용한 일제 문화의 잔재인 지번주소 체계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건물을 쉽고 빠르게 찾기 위해 주소 기준을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전환했다.
2년여 동안 두 주소를 병행해 사용하는 등 적응 기간까지 거쳤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도로명 주소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정책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새 주소 정책을 일방적으로 시행한 탓에 혼선을 빚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에 안전행정부는 비상대책반까지 가동하며 '지속적인 홍보와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호소하고 불편을 줄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착하기까지 사회적 혼란을 피할 수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도로명 주소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지번 주소를 병행 사용하는 '2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오래 지속된다는 예상이 나온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밀어부치기 식'으로 정책을 강행해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도로명 주소의 가장 큰 문제는 관리자의 관점에 도입됐다는 점"이라며 "국민들이 도로명 주소를 이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상황인데 사용자 입장에서 분석하고 예측하는 노력이 미흡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수천년 동안 '면' 중심의 주소 문화를 가진 우리 사회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도로명 주소 도입을 강행해서 될 일이 아니고, 도로명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위치 정보도 제한적"이라며 "4000억원을 들여 도로명 표지판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1개당 교체비용이 800만원에 달하는 교통표지판은 하나도 교체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도로명 주소가 정착하는 데 최소 10년이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강제적으로 정책을 시행할 일이 아니라 시민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며 "도로명 주소 체계를 정착하기 위해 기본 계획을 다시 세워 5년마다 재정비하고, 필요한 경우 별도의 주소 체계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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