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남자, 참 못난 인간이여…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기사등록 2013/12/05 06:11:00 최종수정 2016/12/28 08:28:22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자신의 어머니마저 권력을 위해 저버리는 철 없는 '도련님', 무(武)와 문(文)의 몰락을 대변하는 대장군과 유자(儒者) 등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은유와 풍자로 넘쳐난다.

 지적인 유희에 앞서는 것은 그러나 남성 관객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연극에서 남성들은 명분도 없는 권력 싸움에만 몰두한다. 새벽밥 먹을 때 개국한 나라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망하는 난세에도 그들에게 삶의 터전은 뒷전이다.

 이런 와중에 생명을 돌보고 밭을 일구는 여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아직도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생명을 잉태하고 직접 낳는 여성은 태생부터 남성보다 삶을 품고 있다. 남성들은 이를 무의적으로 또는 부러 모른척 한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나라를 새롭게 창업하고자 하는 도련님과 그의 군대, 화전민 여인들의 대립과 갈등을 다룬다. 도련님과 대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나라를 세운다는 미명하에 전쟁과 살상을 자행한다. 노동 없이 먹을 것만 축낸다. 화전민 여인들은 그런 병사들을 먹이고, 씨종자를 나눠준다. 다시 밭을 일구고 애를 배고 그 애를 키운다.

 연극은 이렇게 남성중심 '개국신화'의 허상을 까발린다. 남성들은 나라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기에 바쁘고 여성들은 여기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분주하다.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영화적 상상력 때문에 '괴물작가'로 통하는 김지훈(34)씨의 작품이다. '원전유서', '풍찬노숙'에 이은 김지훈표 개국신화 3부작의 마지막이다. 본래 4시간 가량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김 작가와 반대로 미니멀리스트로 통하는 연출가 김광보(49)씨가 연출의 과감한 생략과 만화 같은 연출법으로 이를 2시간으로 줄였다. 방대함을 빌린 개국신화의 위선의 민낯을 축약을 통해 가감없이 보여준다.

 애초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재개관작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공사가 지연됨에 따라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으로 공연 장소를 옮겼다. 500석 규모에서 200석 규모의 극장으로 갑자기 변경되는 바람에 미리 맞춰놓은 동선과 무대 설치 등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는 무대디자이너 박동우씨가 담당한 무대는 공간 활용의 극치를 보여준다. 관을 일정치 않게 쌓아 산을 형상화한 무대는 민초의 희생을 상징한다. 흡사 지층의 부정합을 담은 그 모습은 역사의 끊임없는 단절도 의미한다.

 제목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여인들이 전쟁터를 훔친 게 아니라 거기에 할 수 없이 갇혔다. 삶의 터전을 도둑맞은 것이다. 그렇게 제목에서마저도 남성 중심의 시각을 풍자한다.

 극에서 여성이 생리 때 샅에 차는 헝겊 조각 '개짐'이 붉게 물드는 것을 역적의 조짐이라 여기고 도련님을 비롯한 남성들은 이를 빼앗으려 한다. 그 피를 보고 자신들이 태어난 것을 남성들을 까무룩하게 잊는다.

 남성 관객들이 이를 보고 부끄러워할 때 여성 관객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기를 낳은 막내만 남고 나머지 여성 셋이 죽은 뒤 생명을 품는 산은 삶의 터전을 떠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산은 또 다른 개국을 위한 기반으로 사용될 조짐을 보인다. 아들을 위해 죽어간 도련님의 어머니처럼 모성은 끝까지 자신을 희생한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스스로 피 흘릴 줄 아는 삶의 고귀함, 만개한 상상력과 절제의 미학을 조화시켜 찬양한다.

 다만, 전쟁터에 갇힌 여인들이 도련님의 모친과 교감하는 장면 등 과정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부분이 있다. 극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관객들에게 다소 불친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 흠이다.   

 배우들은 일관되게 호연한다. 전쟁터를 훔친 네 여인들 중 모성을 상징하는 첫째 '매지' 역의 길해연(49)을 비롯한 여배우들의 연기는 일품이다. 대장군 역의 이호재(72)와 늙은 유자 역의 오영수(69) 등 베테랑들은 극을 탄탄히 떠받친다.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으나 철이 없는 도련님은 연극배우 이승주(32)가 맡아 열연한다. 말발굽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바람 소리 등을 내는 시인 겸 음악감독 황강록씨가 이끄는 음악 팀은 극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2013 국립극단 가을마당'의 창작희곡 레퍼토리 작품이다. 8일까지 볼 수 있다. 2만~3만원. 국립극단 1688-5966  

 만개한 상상력과 절제의 미학 ★★★☆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