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가무극, 그 황홀한 존재증명…'잃어버린 얼굴 1895'

기사등록 2013/09/26 07:21:00 최종수정 2016/12/28 08:06:33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 덕분이다. 사진 촬영이 일상이 됐다. 그러나 선대들은 근래까지도 사진을 '박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다.

 서울예술단(이사장 김현승)의 창작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의 주인공 '명성황후'도 그랬다. 이번이 초연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비 명성황후(1851~1895)의 사진이 남겨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1910년 8월29일 한·일 강제병합일 저녁. 막 문을 닫으려는 한성의 한 사진관을 노인이 방문한다. 그는 조선왕조의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고 있다. 사진관을 지키던 사진사 '휘'는 왕비의 사진이 없을 거라고 답한다. 이후 두 사람이 왕비에 대한 서로의 기억을 돌아보면서 극은 1897년 명성황후의 국장일로 옮겨진다.

 휘는 황후 생전 악연을 맺은 인물이다. 임오군란 당시, 피난 온 왕비의 신분을 모른 채 내뱉은 험담으로 인해 휘의 고향집은 부서져 사라지고 어머니는 매를 맞아 죽었다.

 어느날 사진관에서는 궁중예복 차림을 한 궁녀 '선화'가 사진을 박는다. 그녀는 왕비의 액땜을 위한 시종이자 휘의 정혼자이기도 하다. 왕비는 자신의 얼굴을 궁금해 하는 외국 언론과 국내외 정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진 박기를 거부해왔는데, 왕비의 사진을 구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이 나타난다.

 극 속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극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얼굴 1895'는 액자식 구성이다. 그런데 무대의 주축을 이루는 오브제 역시 사진을 담는 액자다. 명성황후와 고종 등 등장인물은 무대 위에 늘어진 다양한 크기의 여러 액자 안을 들고나며 지난한 역사에 눌린 감정을 내보이고 삭인다.  

 '잃어버린 얼굴 1895'는 팩션임에도 이를 통해 진심을 얻는데 성공한다. 역사적 사실은 그 거대한 담론만으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내적인 요소를 함몰한다. 그러나 이 가무극은 편견이라는 틀에 갇힌 인물들을 액자라는 새로운 틀로 다시 보게끔 만든다. 멋대로 해석하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입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 명성황후가 그 대상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권력싸움을 벌인, 독한 악녀의 이미지로 새겨졌다. '잃어버린 얼굴 1895'는 그보다 봉건의 환경을 뚫고 근대의 주체가 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찾고자 했던 그녀의 삶을 그리고자 한다.

 물론 휘가 겪은 아픔처럼 몽매한 백성을 일깨워주겠다면서 포악한 면도 내보인다. 그러나 남편 고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로서의 아픔, 유산하는 '엄마'로서 상처 등 그녀가 겪었을 아픔을 보듬고자 했다. 그녀가 사진을 찍지 않았던 이유는 백성 앞에 당당한 황후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유예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이야기가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힘을 얻게 되는 주된 이유는 탁월한 무대 활용에 있다. 여러 대의 빔프로젝터로 매핑한 고궁 등의 모습은 검은 화선지에 흰 붓으로 그린 듯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매혹적이다. 매핑 기술은 또 장면 전환을 용이하게 하며 페이드 아웃, 와이퍼 등 영상의 효과까지 넘본다. 여러 층으로 나눠져 끊임없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궁궐, 논밭, 호수를 묘사하는 바닥 무대는 불균질하고 불안한 역사 상황을 대변한다. 13개월 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지난 2월 재개관한 CJ토월극장의 장점을 충분하게 살려낸다. 전작 뮤지컬 '해를 품은 달'에서 화려한 무대 미학을 선보인 오필영 무대디자이너의 기량이 다시 한번 증명됐다.

 1막을 마무리하는 '잃어버린 얼굴'을 비롯해 '날 보아줘요' '바보 같은 내 사랑' '그 누가 알까' 등의 넘버도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면을 겸비하면서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아우른다.

 '잃어버린 얼굴 1895'가 이를 통해 증명하는 것은 가무극의 존재다. 가무극은 음악과 무용, 연극 등이 혼합된 종합예술로 뮤지컬 형식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춤과 노래의 비중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뮤지컬과 구분지으려 하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가무극의 뉘앙스를 적확하게 살려낸다. 2막에 억지스럽지 않게 등장하는 굿판 등 고민의 흔적이 충분히 느껴진다.

 이런 점을 통해 촌스럽게 한국적인 뮤지컬을 선보였다는 '국위선양'식의 말을 꺼내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다소 한 방향으로 다소 치우친 국내 시장의 뮤지컬에 다양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명성황후 역의 뮤지컬스타 차지연(31)은 과연 누가 이 캐릭터를 대신할 수 있을까라는 확신이 들 정도의 카리스마와 서정성을 뽐낸다. 서울예술단의 대표작 '바람의 나라-무휼'에 이어 이 단체와 두 번째로 협업한 스타연출가 이지나(49)는 또 다른 형태의 상징적인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다만 이야기가 복잡하고 동선이 많아 시선이 분산된다는 점이 흠이다. 그러나 차지연과 휘 역의 손승원(23) 등 객원 배우와 고종 역의 박영수, 선화 역의 김건혜, 김옥균 역의 김도빈 등 서울예술단의 단원들이 단단한 호흡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모든 대사를 영어 자막으로 번역, 무대 양 쪽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서울예술단의 정혜진 예술감독이 진두지휘했다. '달빛 속으로 가다'의 극작가 장성희가 대본, '빨래'로 주목 받은 작곡가 민찬홍이 음악을 맡았다. 안무 정혜진, 의상은 민천홍이 담당한다. 29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볼 수 있다. 4만~8만원, 서울예술단. 02-523-0986

 가무극, 황홀한 존재 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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