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뉴시스】노수정 기자 = 성인키를 훌쩍 넘긴 잡풀, 무너지고 부서진 폐가에 숨어든 도둑고양이,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듯 어수선한 환경. 도저히 사람이 사는 곳이라 보기 힘든 그곳에서 만난 김영진(59·가명)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2007년부터 살고 있어요. 이사오고 나서 재개발 소식을 들었는데 이사갈 형편이 안 돼요. 그나마 전기와 물이 나오는 것을 위안 삼아 사는 거죠."
김씨는 전국 최대 규모의 재개발사업이 진행중인 경기 수원 고등동에 살고 있다. 이곳은 2006년 12월 사업지구 지정 이후 부동산 경기침체와 일부 주민들의 반대 등으로 사업이 중단되는 등 진통을 겪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사업이 재개됐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땅주인과 건물주들이 일찌감치 보상금을 챙겨 떠난 반면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주민들은 여전히 이주에 난색을 표하며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특히 김씨처럼 거주기간이 짧아 주거이전비를 받을 수 없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올 초 상가와 주택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평온했던 동네 풍경은 폭격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황량해졌다.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이 떨어져 나간 채로 방치되고 쓰레기가 넘쳐나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슈퍼, 미용실, 세탁소, 음식점 등이 들어섰던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이제는 가까운 슈퍼를 가려고 해도 20~30분을 꼬박 돌아가야 한다. 집 바로 앞에서 덤프트럭이 오가며 철거공사를 진행중인 탓에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맡을 수밖에 없다.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 곳곳에 재개발지역임을 알리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LH가 고용한 경비업체가 24시간 순찰에 나서면서 폐가로 모여들던 노숙자들과 비행청소년들의 발길도 끊겼다. 한낮에도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이곳은 이제 도심 속 외딴섬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곳이 돼버렸다.
김씨의 경우 어려운 형편에 4년 전 갑자기 쓰러진 뒤로 고혈압에 당뇨 합병증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서 시각장애 4급 판정까지 받았다. 성치 않은 몸에 벌이가 끊기면서 곰팡이 가득한 아슬아슬한 건물 1층 쪽방에 사는 그에게 제때 끼니를 챙겨먹는 일은 이제 사치에 가깝다.
그는 "철거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심난해져 낮 동안에는 집에 있을 수 없다"면서 "TV에서나 보던 일을 내가 당하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다. 무기력증에 빠져 밥을 먹기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싫다"고 했다.
김씨와 같은 기초생활수급자인 최민한(48·가명)씨는 얼마 전 그나마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건설현장에서 산업재해를 당해 크게 다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그는 가족도 없이 홀로 쪽방을 전전하다 2007년 이곳에 터를 마련했지만 강제철거를 당하면서 당장 오갈데 없는 신세다.
사정이 이렇자 LH는 150만원의 보증금만 내면 월 2~3만원짜리 주택을 제공하는 매입 임대주택을 안내했지만 당장 한푼이 없는 수급자들은 비현실적 정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6일 고등동 주택 6가구에 대해 1차 강제철거를 한 LH는 연내 이주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순차적으로 대집행에 나설 계획이다.
LH고등사업단 관계자는 "연내 지장물 철거가 완료되지 않을 경우 사업 추진에 차질이 예상된다"며 "사정은 딱하지만 매입 임대주택 등 도움의 손길을 거부한다면 우리로서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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