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1965년 9월 태국의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540만달러에 따냈다. 한국 건설 사상 첫 해외공사 수주였다.
야침차게 시작했지만 해외 건설은 밑바탕부터 달랐다. 태국의 기후, 풍속, 법률이 모두 낯설었다. 더군다나 해외의 건설 근로자는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이나 일을 대하는 자세도 한국인과 많이 달랐다. 장비라도 좋으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그러나 현대가 투입할 수 있는 국내에서 사용하던 재래식 장비들 뿐이었다. 간혹 신식 장비를 가져다 주어도 현장 근로자들이 다룰 줄 몰라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니 첫 해외 공사에 대한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돌아왔다.
"운이란 때다. 확실히 좋은 때와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앉아 놀아도 마당에 호박이 절로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또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지도 않는다."
정 회장의 독려로 현대건설은 사력을 다해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1966년 6월에 시작한 공사는 1968년 2월까지 1년 6개월 만에 끝을 맺었다. 극단적으로 열악한 건설 여건이었지만 공사 기한에 맞췄다.
베트남 공사도 많은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전쟁 복구 사업, 메콩강 준설 공사에서도 고생을 했다. 게다가 1971년부터 1973년에 걸쳐 미국의 대 월남 정책이 바뀌었고 1973년 1월에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그동안 월남에 진출해 공을 들였던 한국 기업 대부분이 이젠 해외 진출이 끝났다고 낙담했다. 그래도 정주영은 해외 건설 공사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엄청난 빚까지 졌지만, 국제 기준에 맞는 공사를 할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말했다.
"새로운 도전에는 수업료가 필요한 법이다."
21세기는 석유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래서 요즘도 석유값이 오르면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다. 1973년, 1978년에 일어난 두 번의 오일쇼크는 석유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중동 국가들의 위상을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경위는 이러하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열흘 후, 이에 맞서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여섯 개 석유 수출국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를 열어 원유 가격을 17% 인상하고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매월 원유 생산량을 5%씩 줄일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외국은행들은 앞다투어 한국이 망하지는 않을까 점검에 나섰다. 현대도 조선업과 건설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조선은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건조한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 한 채 비상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졌기 때문에 해운업도 침체됐고 그 여파로 수주받은 12척의 대형 유조선 중에서 3척이 취소되거나 인수거부됐다.
"1척은 이미 완성됐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건조 중인 나머지 2척은 지금이라도 건조를 중단합시다."
"아닙니다. 이 시련 앞에 포기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것을 찾아봅시다."
이어지는 대책회의에서도 뾰족한 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주영이 한 가지 안을 냈다.
"그럼 우리가 그 배를 이용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시다.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나라가 쓰는 기름을 외국 회사들이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굳이 외국 회사에 맡길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해서 인수가 취소된 3척의 유조선을 가지고 만든 회사가 지금의 현대상선이다. 그러나 정주영의 고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밖에서 벌어서 안을 살찌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베트남 진출은 막혔고, 오일쇼크로 전 세계는 불황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가만히 생각해보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 지금 양지는 바로 중동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해외 시장 개척지로 중동 지역을 노렸다.
"회장님, 저희는 반대입니다. 그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욕심입니다." 반대를 하고 나선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외건설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던 정주영의 아우, 정인영이었다.
정주영은 예상치 못한 아우의 반대에 말문이 막혔다.
"정 부사장, 그렇지가 않아. 기업에게 제자리걸음이란 후퇴나 마찬가지야. 우물쭈물하다가는 남의 꽁무니만 쫓아가는 꼴이 되고 말아. 겨우 부스러기나 주워 먹게 된다니까."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벌써 잊으셨습니까? 현대건설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고생은 했지만 귀중한 해외 건설 경험과 실적을 얻었어. 우리 한국도 할 수 있다는 것, 현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 그때 씨를 뿌렸으니 이제 거두러 가야지."
정인영 부사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껏 형님 고집대로 했지만, 이번만은 절대 안된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정주영은 동생을 따로 불러 달래도 보았다.
"네가 날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 네 힘이 가장 필요할 때다."
"형님, 이번 한 번만 양보하십시오. 중동은 태국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오늘 신문 보셨지요? 경제학자들도 중동 진출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국내 경제학자들도 중동에서 오일 달러를 들여오면 달러가 갑자기 늘어나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오를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인영 부사장은 이런 그거들을 바탕으로 반대의 심지를 더 강하게 굳혔다.
"인영이, 너 기어이 내 뜻을 거스르겠다는 거냐?"
"형님, 제가 무턱대고 반대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번에는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닌 아우가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섭섭하고 화도 났다. 정인영 부사장과는 전쟁 통에도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사이였다.
게다가 현대건설은 정인영 부사장과 함께 시작해 자식처럼 키워왔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뜻에 반대하다니. 마음이 아팠다. 정인영도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형님이 답답했다. 형제 간의 의견 차이를 좁혀지기는커녕 골만 깊어졌다.
정주영은 회사 내에 아랍어 강좌를 열게 했다. 이것을 본 정인영도 이에 맞서 직원들에게 "누구든지 회장님의 중동건설사업 진출에 찬성하고 나서면 즉시 파면조치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어허, 이 녀석 봐라.' 정주영 회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동생 인영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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